행복의 나라를 상상하다
제가 좋아하던 책 중에 안광복의 [도서관 옆 철학카페]라는 에세이가 있었는데요 거기엔 '변화의 시대일수록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는 글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엄청난 변화의 시대인데 이제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 팬데믹 현상까지 일어나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삶의 변화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변화의 시대에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래 전에 제가 썼던 글을 한 편 불러왔습니다. 그 글은 제가 꿈꾸던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도서관일 것이라고 했다죠. 저도 중학생 시절 햇빛이 드는 정독도서관 참고열람실에 앉아 한가롭게 책을 읽던 기억을 가끔 떠올립니다. 아마도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간과 장소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도서관에 가는 건 꼭 책을 읽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급하게 앞으로만 달려가던 효율의 시간을 멈추고 나는 지금 어디 있나,하는 응시와 축적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곳에 가는 게 아닐까요?
도서관을 떠올린 토요일 아침, 저는 전자책으로 박근형의 희곡 [너무 놀라지 마라]를 읽은 뒤 '스티븐 킹의 사계'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집 [스탠 바이 미]를 구입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한옥 툇마루에 앉아 이 책을 읽을 겁니다. 그 전에 아까 말씀드렸던 짧은 글을 하나 올리겠습니다. 제목을 바꿀까 하다가 그냥 처음 썼던 대로 '행복의 나라를 상상하다'로 가기로 했습니다(본문을 아주 살짝 고쳤습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세상의 동쪽 어딘가에 있다는 행복의 나라를 상상해 본다. 그 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정치에 관심이 없다.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민주적인 생각의 틀이 전통으로 잘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중앙정부는 때때로 민의를 물어 법률을 개정하거나 곧바로 현실에 적용하기 때문에 따로 국회의원들이 발의를 미끼로 유세를 떨거나 시민들을 협박할 수 없다. 그나마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들은 언론과 비정부기구들이 힘을 합쳐 퇴출하기 쉬운 구조를 만들어 놓아 함부로 까불지도 못한다. 막말, 거짓말, 성추행 3종 세트 중 하나라도 실행하는 사람은 그날로 정치 인생이 끝나기 십상이다.
그 나라엔 과로사가 없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하루 4시간 정도만 일한다. 그래서 어떤 직장은 4교대까지 가능한 곳도 많다. 생산직이나 공무원들만 그런 게 아니다. 물론 작가나 프로그래머, 기획자 같은 사람들 중에서는 하루 10시간 이상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큰 사회적 존경과 보상을 받는다.
초등학생들은 숙제가 없다. 그날 배운 걸 그날 학교에서 다 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엔 놀면 된다. 아이들은 하고 싶은 공부를 선택해서 배울 수 있고 일년에 한 달은 자율학습을 할 수 있어서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 선행학습은 전면 금지되어 있다.
부자들은 세금을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은 세금 혜택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부자들 중엔 집을 사지 않고 전세나 월세로 사는 사람이 많고 서민들은 집을 사는 경우가 많다. 서민일수록 대출 받기가 쉽기 때문이다.
상을 받는 경우 어린이든 어른이든 거의 대부분 부상으로 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경험은 여행이라는 사회적 합의 때문이다. 상품은 배낭여행부터 크루즈까지 다양한데, 예를 들어 '용감한 시민상'을 받은 경우엔 몇 달씩 크루즈 세계여행을 시켜 주기도 한다.
벌을 받는 경우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교도소는 수만 권의 책이 꽂혀있는 대형도서관이다. 재소자들은 휴대폰이나 컴퓨터 등 전자기기를 몰수 당한 후 도서관에 갇혀 책을 읽어야 한다. 읽어야 할 책의 할당량이 주어진 것은 아니나 책을 읽은 뒤 독후감을 쓰는 경우엔 글의 질과 양에 따라 복역기간이 줄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수감 생활에 만족하는 편이기 때문에 독후감 쓰기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드물다. 일시적인 전자기기 사용 금지로 금단증상을 겪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 쉽게 아날로그적인 상황에 적응한다. 요즘은 인터넷이 되지 않는 전자책 옵션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교도소에 다녀 온 사람일수록 삶이 여유롭고 윤택해졌다고 고백하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교도소(矯導所)에 가서 삶이 교도(敎導)된 것이다.
어느날 아침, 대통령 선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약 교도소가 도서관이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던 게 떠올라서 아무렇게나 써본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