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세풀베다 <탈선>
안데스 산맥을 향해 가던 열차가 안개에 휩싸인다. 칠레 기차역을 출발해 열여덟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데다 안개까지 짙게 껴서 열차는 멈춰 서고 만다. 승객 중에는 미용을 배우는 학생도 있고 속옷 상인, 웰터급 권투선수, 신혼부부도 있다. 기관사들은 짙은 안갯속에 무전기도 고장 나 버렸다며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한다. 멈춘 열차 밖을 살피기 위해 기관사와 권투선수가 안갯속으로 사라졌다가 돌아와 말한다. "우리는 다리 위에 있습니다."
정말이었다. 다들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미용을 배우는 학생이 부끄러운 듯 가방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꺼냈다. 오, 좋은 생각이야. 일곱 시니까 뉴스가 나올 시간이야! 뉴스 아나운서는 산페드로 화산 지대 근처에서 일어난 비극적 탈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열차는 제동장치 고장으로 철로를 이탈해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으로 보이며, 생존자는 없다. 사망자 중엔 유명 권투선수도 있다. 승객들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며 그들이 이미 다 죽었음을 깨닫는다.
이삿짐 정리를 하면서 또 수십 권의 책을 솎아내다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집 [외면]을 꺼내 <탈선>이라는 아주 짧은 소설을 읽었다. 마치 <트왈라이트 존>이나 <블랙 미러>처럼 짧지만 신비롭고 재미있었다. 책을 덮은 뒤 무심코 구글에 세플베다를 타이핑했더니 얼마 전 사망했다는 기사가 뜬다. 코로나 19에 감염되어 50일 동안 투병하다가 결국 세상을 버렸다는 것이다. 요즘 이사 때문에 거의 책을 읽지 못했는데 하필 얼마 전에 죽은 세풀베다의 책을 읽다니. 이 이 소설은 예전에 빌려준 책을 찾으러 국동이 형 집에 갔다가 내 책 대신 가져온 작품집이었다. 국동이 형은 그때 이 책 맨 앞에 실린 <산티아고에서 사라진 집>이라는 단편이 정말 슬프고 끝내준다고 했다. 회사 다닐 때 전철 안에서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도 난다. 코로나 19는 인종도 사상도 나이도 가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또 이런 멋진 작가가 희생되었다. 몸도 마음도 지치는 나날이지만, 정말 조심하자. 우선 살아남아야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술도 마신다. 힘을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