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May 01. 2020

순자는 빨치산의 손녀 – 정지아의 <검은 방>

K-Fiction Series

우리 집에 사는 고양이 순자는 전남 구례에서 왔는데, 순자의 어미를 키우던 분은 [빨치산의 딸]을 쓴 소설가 정지아 선생이다. 아내는 가끔 정지아 선생에게 순자 사진을 찍어 보내며 안부를 묻곤 한다. 얼마 전엔 순자가 시크하게 잘 살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그 애 어미도 좀 시크한 편이었어요.”라는 답장이 왔다고 했다. 정지아 선생은 답장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작은 소설 <검은 방>을 보내왔다. 책날개를 살펴보니 K-Fiction Series라고, 박민규부터 손보미, 황정은, 장강명, 김금희, 최은영, 강화길, 조남주, 백영옥 등 근 십 년간 가장 인기 있는  작가들의 단편을 모아 출간하는 기획의 맨 마지막 줄에 정지아 작가의 이름과 작품이 올라 있다.


마흔이 넘어 딸을 낳은 정지아 작가의 어머니처럼 소설 속 주인공도 지리산에서 첫 남편을 보내고 옥살이를 한 끝에 만난 옛 동지와의 사이에서 늦둥이 딸을 낳았다. 영하 사십 도를 훌쩍 넘는 한겨울에도 누더기에 짚신 차림으로 거침없이 지리산을 누볐던 빨치산들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가 뭣 땀시 그 고상을 했을까라?”라며 불을 켜지 않은 검은 방에서 과거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정지아 작가 본인 어머니의 모습이었을 것이며, 어머니에게 골백 번은 더 들었을 이야기들이 ‘도무지 초연해지지 않아’ 소설로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스물다섯에 연재했던 [빨치산의 딸]은 이적표현물이라는 누명을 쓰고 판금조치되었고 작가는 도피 생활을 해야 했으나 이윽고 세상은 변해 빨치산 같은 무거운 이야기도 이렇게 작고 날렵한 사이즈의 소설 속에 담기게 되었다.

 

고양이 순자가 맺어진 빨치산 딸과의 인연. 그러나 작가가 이야기하듯이 이 단편소설은 빨치산의 후일담이 아니라 '아무리 사소한 인생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소한 기억에 불멸성을 입히는 것'이 작가의 의무이자 보람이라는 것을 독자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아내는 이 소설을 읽고 돌아가신 엄마를 다시 생각하느라 눈물을 지었다고 했다. 나도 매일 저녁 전화기 앞에서 내 전화를 기다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슬픈 모습은 아니었다. 검은 방 안이라고 해서, 전화기 옆이라고 해서 무조건 슬프다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인생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드라마틱하니까.  정지아의 <검은 방>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쓰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얇은 소설책이지만 왼쪽엔 한글로, 오른쪽엔 영어로 쓰여 있어서 내용은 더욱 짧다. 소설 뒤엔 작가의 창작 노트도 실려 있다.  해설은 지나치게 길기만 하고 재미가 없으니 건너뛰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책 맨 뒤에 붙어 있는 '비평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사족이다. 특히 '고욤나무'에 대한 문장은 지나치게 길고 어색하다. 문학평론가들 때문에 잘 나가다가 끝에 가서 까탈을 부리는 이상한 독후감이 되고 말았다. 그냥 소설만 읽을 걸.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도 우리 부부는 ‘같이 죽자!’라고 외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