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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07. 2020

나는 왜 제주에서 한 달간 일기를 썼던 걸까?

뒤늦게 써보는 ‘아내 없이 제주 한 달 살기’의 인트로

2019년 11월 5일에 제주도로 내려가 12월 5일 다시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꼬박 한 달간 나는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별장에서 혼자 지내며 매일 저녁 일기를 썼다. 원래는 하루에 한 장씩 집 안 어딘가에서 사진을 찍고 거기다가 서너 줄의 독백 메모를 일지 형식으로 남길 생각이었다. 예를 들면 두꺼비집 사진을 찍고 거기다 "아직은 퓨즈가 튼튼하다. 그러나 언제 끊어질지 모르니 어딘가엔 여분의 퓨즈가 있어야 한다. 내 인생에도 여분의 퓨즈는 있는가?" 같은 식으로 폼나게.

그런데 첫날 일기를 써보니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혼자 살아도 사람이라는 존재는 서너 줄의 메모로는 끝낼 수가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내가 로빈슨 쿠르소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람에겐 늘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그래서 '제주 첫날' '제주 이틀 째'이런 식으로 제목을 무심하게 정하다가 사흘 째 되는 날부터 '시외버스와 고기국수' 'A4 지와 한우 등심'처럼 사연이 있는 타이틀로 교체를 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독하다 토요일' 연말 모임 때문에 주말에 잠깐 올라갔던 날 빼놓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일기를 썼다. 제주로 잠깐 내려왔던 배우 이승연과  친구 표문송이 함께 술을 마셨던 하룻밤씩을 빼놓고는 늘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도중에 구하라 사망사건 때는 원래 쓰던 내용을 버리고 애도 일기를 쓰기도 했다. 왜 이런 글을 꼬박꼬박 썼는지 물으면 나도 할 말이 없다. 사람이 살다 보면 목적이 불분명한 일을 가끔 하기도 하는데  아마 나는 그런 일이 좀 더 잦은 놈인 것 같아요,라고 소심하게 대답하는 수밖엔.

오늘 연재하는 칼럼의 마지막 회를 쓰기 위해 에버노트를 뒤적이다가 제주 일기를 정리하려 쓴 이 글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라는 타이틀로 브런치에 페이지를 만들어 연재를 하긴 했지만 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제주 일기의 취지를 써보았다.  첫째 날부터 제목들만 차례차례 읽어나가도 그 날들이 새삼 떠올랐다. 아마도 이래서 이 글들을 쓴 것 같다. 지금처럼 언젠가는 다시 한번씩 이 글들을 꺼내보게 될 테니까. 그때 나는 이런 마음이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내던 나날들도 있었구나, 하고 언젠가 되돌아보고 싶어서. 과거가 없으면 미래도 없는 거니까. 이런저런 하루하루가 쌓여서 내 인생 전체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는 마음으로.

목차

1. 제주 첫날
2. 제주 이틀째
3. 시외버스와 고기국수
4. A4 지와 한우 등심
5. 고독과 외로움

6. 행복하려면 항복하라
7. 이중 외박
8. 한라산을 마시며 소설을 읽는 저녁
9. 유리를 깨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10. 세븐일레븐 성북점과 성북문화점, 그리고 벌새

11. 아내는 서울 낮술을, 남편은 제주 밤술을
12. 순자 목욕 사건
13. 눈물이 많아졌다
14 마술 같았던 하루
15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6. 평일 대낮 바닷가에서 셀카 찍던 중년남의 진심은
17. 특별하지 않아 더 특별했던 2019년 11월 26일
18. 심란해도 밥은 입으로 들어가고
19. 제주에서 칼럼 연재를 시작하다
20. 아무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21. 아무도 만나지 않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눈 날
22. 커피와 소설책만 있었던 일요일
23. 발사되지 않은 총
24. 거울 선생이 태어나 날, 아내는 불을 뿜고
25. 제주에서 아내 없이 혼자 보낸 두 번째 허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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