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입을 열다

성북동 소행성의 말하는 고양이 순자

by 편성준

나는 새벽에 일어나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이른 아침엔 사방이 고요하고 전화나 메신저도 전혀 오지 않기 때문에 조용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엔 최적의 시간이다(그러므로 새벽에 오는 전화만큼 무서운 건 없다). 그렇다고 아침잠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도 하는 일 없이 해뜨기 전부터 일어나 설치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광고회사를 다닐 때도 뭔가 급한 일이 있으면 야근을 하는 대신 새벽 출근을 해서 일을 하는 편이었다. 한없이 늘어지는 밤 시간보다는 긴박감 있는 새벽 시간에 아이디어를 내거나 뭔가를 정리하는 게 결과도 더 좋았다. 작년에 회사를 그만둔 뒤에는 새벽에 일어나 혼자 노는 게 나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실제로 퇴사 초기엔 아침에 노는 것에 충실하려고 한동안 술을 끊은 적도 있었다. 술 마신 다음날 숙취로 아침 시간을 빼앗기는 게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만들어 마시려다가 아침에 커피부터 마시면 몸에 안 좋다고 하던 아내의 충고가 떠올라 캐비초크를 먼저 한 잔 타서 먼저 마시고 신문 칼럼을 하나 읽은 뒤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순자가 와서 한 마디 했다.

"니 인생도 참..."


커피를 내리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이렇게 뇌까리던 순자는 햇볕이 드는 마루로 가서 다시 게으르게 누웠다. 어이가 없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순자가 반말을 하는 게 어이없다는 얘기가 아니다(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자). 일단 순자가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할 자격이 있냐 하는 것이다. 순자는 3년 전 우리 집에 온 고양이다. 스코티시폴드 형제 중 유일하게 귀가 쫑긋한 스코티시 스트레이트(정식 명칭은 아니고 편의상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였는데 접힌 귀 때문에 인기가 많은 '폴드' 형제에 비해 분양이 잘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는 우리 부부가 입양을 결심했던 고양이였다. 접히지 않는 귀 때문에 인기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 '스트레이트' 주제에 어디다 대고 남의 인생 운운하며 혀를 찬단 말인가. 그러나 말수는 적지만 머리는 좋은 순자가 이런 얘기를 느닷없이 던진다는 것은 뭔가 의미가(또는 시빗거리가) 있어서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순자의 발언에 반발하기 전에 정말 내 인생은 어떤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비록 고양이지만 어쨌든 내 인생에 화두를 던진 셈이니까. 그래도 화는 났다.

"야, 내 인생이 어떻다고 시비냐?"

"넌 회사도 안 다니고 일 년째 빈둥빈둥 놀고 있잖아."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작년 5월 말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다른 회사로 옮길 생각이 있거나 당장 직업을 바꾸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단 회사 다니는 게 너무 괴롭고 재미가 없었다. 힘이 들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보람이나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내 회사 생활엔 더 이상 그런 게 남아 있지 않았다. 매일 마주치는 광고인이나 클라이언트들이 보여주는 한결같은 즉물적 사고방식에도 회의가 일었고 무엇보다 광고 일 자체에 신물이 났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카피라이터와 기획실장으로 이십 년 넘게 광고 대행사나 프로덕션에 다니고 프리랜서로도 일을 해왔지만 평생 남의 걱정만 해주느라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걸 모두 흘려버린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회사를 다니면서 다른 일을 도모해보는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한 번 일에 얽매이면 다른 걸 전혀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사무실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도 수고했다는 말 대신 비난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던 날 아침 나는 전격적으로 회사를 그만 두기로 결심했다. 아내도 나의 선택에 찬성해주며 좀 쉬다가 글을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응원을 해주었다. 물론 구체적인 대책 같은 건 없었다.


오래전부터 체계 없이 쌓아놨던 원고 더미를 다시 정리해보기로 했다. 이전에 계약했던 출판사와는 계약을 해지했다. 내가 시간을 너무 끌기도 했고 그동안 쓰고 싶은 글의 컨셉도 바뀌어서 출판 기획자인 아내가 '예전 기획을 다시 살리느니 다른 출판사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게 낫겠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새벽 커피와 함께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갑자기 한옥을 사서 수리를 하고 이사를 하느라 몇 달간 글을 쓰지 못하는 시간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마음을 안정시키고 글을 좀 써보려고 하던 마당에 난데없이 순자가 초를 치는 것이었다. 아니, 내 인생이 뭐가 어때서. 그러는 너는 하는 일이 뭔데? 순자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었지만 순자는 이미 언제 내가 그런 얘기를 했느냐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하지만 할 수 없다. 내일 아침에 다시 물어봐야지. 순자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른 아침 중에서도 아주 짧은 몇 분의 시간뿐이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도 괴로워, 말을 하는 고양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