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소행성의 말하는 고양이 순자
뚜라미 선배 진희 누나와 홍민이 형 부부의 딸인 현경이가 일요일에 수서에 있는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했다. 같은 써클에 같은 학번 캠퍼스 커플이었던 홍민이 형과 진희 누나는 비교적 일찍 결혼을 해서 첫 딸인 현경이를 낳았는데 부부가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남 잘 챙기는 인격자이기도 했고 당시만 해도 써클 커플이 낳은 아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현경이는 한동안 주변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존재였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현경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어 갑자기 아빠나 삼촌들에게 대답도 안 하고 쌀쌀맞게 굴자, 충격을 먹은 어른들이 그 문제로 따로 만나 술을 마시며 한탄을 했을 정도였다.
30분 정도 먼저 도착한 결혼식장엔 벌써 많은 하객들이 도착해 있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꺼리는 요즘 인심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규모였다. 나란히 붙어 있던 결혼식 행사 하나가 취소되는 바람에 결혼식은 한결 더 여유 있게 진행되었다. 주례 없이 진행되는 행사는 신랑 신부가 서로에게 쓴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도 있었고 친구들이 그들에게 주는 편지, 육행시, 삼행시 등도 있어 웃음을 자아냈다. 축가 시간엔 연극영화과에 다니는 동생 무정이가 친구들과 준비한 공연이 있었는데 이소라의 <청혼>도 좋았지만 '똑똑한 사람들은 말하죠, 바보들만 사랑에 빠진다고(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를 뮤지컬처럼 혼성 중창으로 편곡해서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예식장에 딸린 피로연장 대신 신부의 엄마 아빠 친구들만 양재에 있는 음식점에 가서 따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뚜라미 선후배들의 얼굴이 반가웠다. 나는 인엽이 형과 붙어 앉아 서로 술을 따라주면서 그 조그맣던 꼬마애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한다고 감개에 젖어 말했다. 걔가 어른이 될 정도로 세월이 흘렀으니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늙은 거냐는 한탄 끝에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다소 철학적인 주제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치기(稚氣)가 없어지는 것 아닐까요? 괜히 센 척하는 거, 건방지게 굴거나 잘난 척하는 거, 어느 순간 그런 게 없어지면 바로 그게 어른이 됐다는 얘기인 것 같아요."
인엽이 형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형이나 나나 왕년에 치기 좀 부렸던 캐릭터들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도 치기를 졸업하지 못한 처지였다.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아직도 고정적인 돈벌이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면서도 멀쩡한 척하고 있으니 이게 바로 치기 아닌가. 공처가의 캘리나 독하다토요일처럼 돈 안 되는 일만 골라하는 것도 치기 아닌가. 그런 생각을 자꾸 하며 나는 시무룩해졌다. 나는 언제 철이 들려고 이러나.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들이 좋아서 헤어질 줄 모르고 계속 술을 마셨다. 몇몇이 집에 가봐야 한다며 일어서자 핑계 김에 모두 일어나더니 또 자리를 옮겨 이차 가게로 가서 맥주를 마셨다. 이러다간 전철이 끊어질 것 같아 먼저 인사를 하고 나왔다. 집에 오니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는데 아내가 냉장고에 조금 남은 소주를 꺼내 혼자 마시고 있었다. 나는 괜히 반가워서 김치냉장고에 있던 '서울의밤'을 한 병 꺼내와 아내와 함께 나눠 마셨다. 이상하게 술을 취하지 않고 몸만 무거워지는 밤이었다. 아내에게 무슨 일로 술을 마시냐고 물었더니 배가 고파서 냉장고를 뒤지다가 술이 남았길래 그냥 한 잔 하는 거라고 했다.
"웬 술을 그렇게 오래 마시냐?"
아침에 마루로 나갔더니 창문 앞에 놓인 의자 위에 앉아 기지개를 켜던 순자가 하품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순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도대체 하루 종일 집에서 노는 아이가 뭐가 기분이 안 좋을 일이 있는 것일까.
"적당히 마시고 일어서지 그랬어?"
"어른들이...... 그게 맘대로 되나."
"이봐, 나도 어른이야."
"......"
"그리고 사람들 모이는 데선 마스크 벗지 마. 재욱이처럼 술집에서도 쓰고 있으라고."
순간, 놀라서 순자를 쳐다보았다. 술집에서 재욱이가 마스크를 하고 있었던 것을 어떻게 얘가 알고 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욱이를 어떻게 알고 있으며, 술집 장면을 직접 봤던 것처럼 그렇게 자세히 묘사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황당하다. 순자는 이제 천재 고양이를 넘어 '신통력 고양이'가 되었단 말인가. 말을 마치자마자 일반 고양이인 척하며 방충문 앞에 앉아 한가하게 그루밍을 하고 있는 순자가 가증스러워 보였다. 앞으로 아침마다 놀랄 일이 더 많아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