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소행성의 말하는 고양이 순자
천천히 아껴가면서 읽던 마루야마 겐지의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라는 책을 아침에 다 읽었다. 이 책을 산 것은 사실 며칠 전 산책이나 하자고 나섰다가 대학로 동양서림까지 걸어간 김에 정세랑의 신작 소설을 찾았으나 마침 다 팔리고 없다는 소리를 듣고 매대를 둘러보다 '글쓰기 코너'에서 그나마 제일 글쓰기 교본 같지 않아 고른 덕분이었다. 마루야마 겐지는 어쩌다 소설가가 되어 문단이나 기웃거리고 연예인처럼 이런저런 곳에 얼굴을 내미는 작가 말고 정말 독한 마음을 먹고 평생 소설에만 전념할 '아직 데뷔하지 않은' 미지의 소설가에게 이 글을 썼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겐지의 글이 어찌나 절절하고도 담백한지 나도 모르게 집중하고 감탄하며 읽게 되었다.
겐지는 말한다. 회사원이나 되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기존 질서에 통합되어 그저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진 않지만 그러면서도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소설을 한 번 써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그러면서 한 번 마음을 정했으면 좌고우면 하지 말고 일단 계속해서 쓰라고 말한다. 평론가나 편집자의 계략에 휘말리지도 말고 선배들의 업적에 주눅 들지도 말고 네가 원하는 바를 우직하게 밀고 나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 소설을 완성하고 나면 다 썼다는 자부심에 흥분하지 말고 곧장 두 번째 작품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그래야 진정한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일이라고 한다. 첫 번째 소설로 데뷔를 하고 두 번째 소설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화제가 되자 처음보다 좋은 소설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부채감에 절치부심 하느라 죽을 똥을 쌌다는 것이다. 겐지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그게 정말이고 진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달에 울다]라는 소설로 겐지를 처음 만났을 때는 혹시 이 사람은 유미주의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다음 작품으로 [천 년 동안에]라는 대작 소설을 읽게 된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경제적인 문제에 시달리지 않고 오로지 소설만 쓰기 위해 시골로 들어간 겐지의 이야기는 [소설가의 각오]라는 책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겐지는 문단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소설 인세 이외에 다른 활동으로 돈을 벌지도 않는다. 겐지가 대단한 것은 선배 작가들의 그늘에 기대서서 후배들에게 꼰대질을 할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후배 소설가들에게 나쓰메 소세끼의 소설도 '훌륭한 것도 있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라고 말하며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 준다. 그러면서 지금의 평론가나 편집자들은 자신이 한때 좋아했던 다자이 오사무나 나쓰메 소세끼 같은 작가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귀뜸한다. 즉, 그런 편협한 시각에 함몰되지 말고 그냥 너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라고 말한다. 양심과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쓰라는 것이다.
"나는 과연 쓸 만한 것을 갖고 있는가, 하는 평론가 취향의 자문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 같은 소설가는 그런 쓸데없는 일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펜을 쥐고 쓰는 것이 바로 당신이 쓸 만한 주제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뭘 쓰고 싶어 하는지를 알고 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써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게 글의 매력이라고 말하는 겐지. 일을 이루려면 꾸준히 해야 하고, 매일 해야 하고, 한 점을 응시해야 한다(너무 먼 곳을 바라보면 오히려 볼 수 없게 된다). 한눈팔지 말아야 한다. 시골로 내려가라고 하는 이유도 그런 뜻에서다... 한 권 내내 소설을 쓰려는 젊은이에게 전하는 진심 어린 고언으로 가득한 이 책은 시각을 확장해 보면 글쓰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직업이 무엇이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잘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찾는 사람들이라면 부디 겐지의 고언에 귀를 기울이시라. 이렇게 '라떼'스럽지 않은 강직한 선배의 충고는 정말 귀한 것이다......까지 생각한 뒤 어제 산 정세랑의 신작 [시선으로부터,]를 집어 들었을 때 갑자기 순자가 노트북 사이로 들어오더니 그대로 누워버린다. 명백한 업무방해다. 새벽부터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울고 귀찮게 하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야, 책 그만 읽고 나 좀 쓰다듬어."
"왜 이래, 넌 그런 고양이가 아니었잖아."
"나 그런 고양이야."
"뭐...? 어이가 없네."
"내가 그랬잖아. 머리는 좋지만 고양이의 본능도 함께 가지고 있어서 괴롭다고."
"이리 누워봐."
"음, 좋아. 좋아. 그리고 마루야마 겐지는 내 친구라 가끔 만나기도 해."
"뻥치지 마라."
"겐지, 정말 훌륭한 인간이지. 그리고 정세랑 이번 소설 참 좋더라. 난 걔가 쓰는 SF보다 이런 소설이 더 좋더라구."
정세랑은 SF든 아니든 스토리텔링이 뛰어난 작가라 그런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변호를 하려다가 말았다. 그런데 어제저녁에 내가 사 온 소설을 순자는 도대체 언제 다 읽었단 말인가. 그보다도 바다 건너 일본에 사는 마루야마 겐지와 친구라는 건 또 무슨 구라인가. 순자는 뻥쟁이 고양이였단 말인가. 점점 알 수가 없다. 순자는 자기가 오늘 아침에 너무 말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지 어느새 입을 다물고 등을 보인 채 부엌 쪽을 쳐다보고 그림 같이 앉아 있다. 내일 아침까지는 계속 저러겠지. 여우 같은 고양이 같으니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