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이야기
군대에 있을 때였습니다. 중대 서무계였던 저는 오전 내내 바쁜 일과를 보내고 점심을 먹은 뒤 중대원들의 식기를 모두 닦고 물기를 제거한 뒤(상병이라 식기 당번이었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와 그제야 한숨을 돌리는 기분으로 아침에 배달된 조간신문을 펼쳤죠. 조선일보였던가, 조그만 박스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느 모녀와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라는 어린이 연극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지방에 사는 아이 엄마는 딸에게 이 연극을 꼭 보여주고 싶어서 고속버스를 타고 함께 서울로 올라왔답니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공연 소식은 포스터나 뉴스 같은 아날로그 매체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서대문에 있는 극장까지 물어 물어 찾아가 보니 휴관일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월요일만 공연이 없는 날인데 하필 그 날 올라온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날 다시 올라와서 공연을 볼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던 거죠. 아쉽지만 그만 돌아서려고 하는데 직원이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했습니다. 오늘 부분 연습을 하려고 배우들이 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공연이 시작되니 관객들은 자리에 앉아 달라는 안내 멘트가 들려왔습니다. 모녀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배우들이 예정에 없던 특별공연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두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배우들은 열심히 대사를 하고 신나게 노래와 춤을 선보였습니다. 아이는 배우들의 연기에 깔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고 엄마는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저도 눈물을 조금 흘렸던 것 같습니다. 사무실에서 육군 상병이 혼자 신문 기사를 읽으며 울다니, 저는 참 군대와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던 거죠. 극장 이름은 까먹었지만 민중극단이었던 건 기억이 납니다. 오늘 휴관인 줄 모르고 아리랑도서관에 갔다가 그냥 돌아오면서 이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아마도 비 오는 월요일이라서 그런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