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의 [당인리]
한국전력, 즉 '한전'은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 하던 공기업이었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 쟤네들은 안에서 무슨 일을 하길래 저렇게 월급을 많이 받고 나중에 퇴직금까지 두둑이 챙기는 걸까?' 정도밖에 의문을 갖지 못한 축이었으므로 우리 사회의 기반 시설인 전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이번에 우석훈의 소설 [당인리]를 읽고서야 비로소 전기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석훈이 전기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리려고 소설을 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도대체 이 소설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작품은 나주에 있던 한전 본사에 지진이 일어나면서 벌어지는 대정전(전문용어로는 '전계통 정전')을 다룬 이야기다. 전기가 멈추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장 전깃불이 꺼지고 컴퓨터나 냉장고,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것 정도는 나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화장실 물이 안 내려가 용변을 볼 수 없게 되고 병원 응급실 기기들이 멈춰 혼수상태에 있던 환자들이 즉시 사망하거니 휴대폰 연결까지 끊어지는 등 도시 전체가 죽음과 직면하게 되는 것까지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일단 거리의 신호등이 꺼지니 도로 교통이 마비된다. 슈퍼 컴퓨터가 죽으니 온갖 시스템이 멈추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원전 시설의 냉각기가 열을 내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같은 끔찍한 원전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전기가 딱 두 시간만 멈춰도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것이다.
경제학자이기도 한 우석훈은 이게 두 번째 장편소설인데 에너지 관리공단 팀장이었던 경험 덕분에 이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정말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고 한다. 박사학위를 가진 정말 똑똑한 자신의 친구가 서울에너지공사에 지원했다가 공채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아, 공기업이라는 곳은 실력 말고 다른 힘들이 더 크게 작용하는 곳이구나'라는 걸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리라. 예상대로 이 소설엔 국민들의 목숨과 직결되는 대정전 사태 와중에도 지역 이기주의와 부처 싸움, 시장이나 청와대의 정치 등이 끼어드는 모습을 거의 매 페이지마다 볼 수 있다. 중요한 모든 것이 서울로만 집중되어 있는 중앙집권적 프로토콜, 중요한 자리인데도 늘 전문가 대신 퇴직 정치인들이 포진하게 되는 문제 등등 우리나라의 시스템 전반에 대한 병폐들도 고발한다.
하지만 이런 팩트들을 나열하기 이전에 이 소설은 무척 재미있다는 걸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정전의 징후가 느껴지던 초반부를 지나 오세영의 아내 이현주가 태권도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순간 벌어진 대정전 이후 이 소설은 마치 미드 [24]처럼 주인공들이 거의 잠도 안 자고 먹지도 못하는 긴박한 상황의 연속이다. 거기에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입장과 욕망이 씨줄 날줄로 겹쳐 돌아간다. 우석훈은 소설의 화자인 오세영을 영화 [곡성]의 곽도원에서 찾았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처음에 한정건이나 이준원, 최철규 같은 남성들이 중요 사건의 모티브를 제공하지만 결정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건 이현주, 강선아 정성진, 하누리 등 여성 캐릭터들이라는 점이다. 국가적 위기를 맞아 빛나는 여성들의 리더십과 연대가 믿음직한데, 나는 특히 컴퓨터와 게임에 빠져 살던 전형적인 너드 하누리가 클라이맥스에서 군인·정치인들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대항하는 장면이나 일 끝나면 연구실 옆에 흡연실이나 좀 만들어 달라고 상관에게 요구하는 멘트 등이 귀여워서 좋았다.
우석훈은 엉뚱한 사람이 공을 채가고 정작 고생한 사람들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세상 풍조가 안타까워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 마지막엔 이현주나 하누리의 미래를 꽤 긍정적으로 그렸는데 난 좀 더 씁쓸하게 만들었으면 어땠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변하지 않는 기득권의 모습이나 다른 등장인물들의 작은 변화 만으로도 충분히 씁쓸하긴 하지만. 우석훈은 평생 50권을 쓰는 게 목표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35권 정도를 썼다고 하니 엄청난 생산력이다. 이전에는 [88만원 세대] 등 경제와 사회에 대한 에세이를 많이 썼는데 이제 [당인리]를 통해 스토리텔러로서의 입지도 확실히 굳힌 느낌이다. 이후에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소설도 나온다는데 기대가 크다. 우선 첫 번째 소설 [모피아]부터 찾아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