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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11. 2020

제목부터 홀딱 반하게 만드는 시집

이원하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렇게 쉽고 자백적이면서도 할 말 다 하는 시집 제목을 최근에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카피라이터로 오래 일을 해서 그런지 책 제목이나 간판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특히 시집은 제목이 반이다.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라는 제목만 읽고 그 시집을 산 적도 있는데 나중에야 그 제목이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에서 따온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스물몇 살 때의 일이다. 그런데 며칠 전 페이스북 링크로 인터뷰 기사부터 재미있게 읽었던 이원하 시인의 시집을 도서관 신작 도서 코너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오늘 나는 도서관에서 벌써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나보다 한 살 어린 늙은이의 에세이를 잠깐이나마 읽는 실수를 저질렀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나 사기 같은 글쓰기 실습 책을 한 권 휘리릭 훑어보다가 지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밖에 나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가 신작 코너를 천천히 살펴보니 이 시집이 눈에 딱 띄는 것이었다. 첫 시가 표제작이다. 지금은 시 전체를 다 쓰지 않고 마지막 세 줄만 소개하겠다.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웃을 일 없는 세상에서도 웃음을 주는 사람은 꼭 있다. 그것도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같이 웃으면 좋잖아요,라고 바보처럼 해맑게 웃을 땐 더 대책이 없다. 나는 마지막 말이 '테니까요' 대신 '테니깐요'인 것조차 마음에 든다. 작정하고 웃기기로 마음먹은 착한 시인이다. 물론 그 웃음엔 슬픔이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처럼 스며 있다. 오늘은 이 시집을 빌려가서 일용할 양식으로 삼기로 하자. 아내에게도 뽐을 내며 빌려줘야지. 아내가 차려준 맛있는 밥을 다 먹고 설거지용 앞치마를 두른 뒤 그녀에게 이 시집을 권총처럼 뽑아 주는 게 오늘의 남은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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