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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03. 2020

잘 설계된 부조리극을 보는 쾌감

사무엘 베케트·기국서의 [엔드게임]

무대 위엔 바퀴 달린 의자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엔 어떤 사람이 천으로 덮인 채 앉아 있다. 그리고 오른쪽엔 꾸부정하게 키가 큰 배우 박윤석이 서 있다. 관객들이 하나 둘 들어와 좌석에 앉는 동안  그 상태는 계속되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한 자리씩 떨어져 앉는 객석에 사람들이 꽉 찼을 때 비로소 조명이 바뀌면서 연극이 시작되었다. 클로브 역을 맡은 배우 박윤석이 작은 사다리를 들고 다니며 왼쪽 창문을 열기도 하고 오른쪽 창문 밖으로 바깥을 쳐다보기도 하며 웃는데 갑자기 의자에 앉아 있던 기주봉이 얼굴을 덮었던 천과 손수건을 치우면서 대사가 시작되었다.


하반신이 마비된 햄은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는 반면 햄의 시중을 드는 클로브는 다리가 불편해 앉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둘 다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클로브가 아무렇지도 않게 햄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하고 햄은 "죽여줘."라고 대답하지만 "싫어요!"라고 바로 받아치는 걸로 봐서 이런 대화는 그들의 일상인 것 같다. 그들이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방 왼쪽엔 나무로 만든 커다란 쓰레기통이 두 개 있는데 그 안에서 노인 둘이 뚜껑을 열고 고개를 내밀더니 대화를 나눈다. 햄의 부모다. 왜 두 사람이 쓰레기통 속에 서 사는지는 모른다. 이건 부조리극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햄과 나누는 대화는 신랄한다. "널 낳은 게 실수였어." "근데 왜 낳으셨어요?" "니가 나올지 몰랐지."


보통의 연극은 실생활을 닮으려 노력하지만 부조리극은 대놓고 '이건 연극이야!'라고 말한다. 그런 태도가 삶의 본질이나 인간의 모순을 드러내는 데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사무엘 베케트는 2차 대전이 끝난 상황에서 [고도를 기다리며]와 [엔드게임]을 썼다. 둘 다 대단히 연극적이며 난해한 내용이다. 프랑스어로 희곡을 쓴 그가 고른 영어 제목인 'End game'은 체스 경기의 최종회를 뜻한다고 한다. 희곡을 번역한 오태곤은 '승부의 종말'이라는 제목을 택했다. 어떤 제목이라도 연극의 주제나 흐름을 한 번 나타내기에는 그 뜻이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부조리극은 이런 맛에 보는 것이다. 희극도 비극도 아닌, 조각조각 분절되어 쏟아지는 대사의 향연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와 대화 딕션, 타이밍에 압도당하는 쾌감.


그래서 이런 연극은 연출자가 누구냐가 중요하다. 기국서는 '극단76'을 만들었고 피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으로 대한민국 연극계를 뒤흔들었던 화제의 연출가다. 작년에도 이 연극으로 큰 상을 받았다. 그는 '연출의 변'에서 다소 기괴한 설정으로 출발하는 베케트의 연극은 연극무대의 미학으로만 가능한 부분이 많으니 배우의 연기에 집중해 봐 달라고 부탁한다. 연출에 따라 코미디가 될 수도 있고 심각한 사색의 시간이 될 수도 있는데 자신은 '휴머니즘'을 화두로 잡았다고 하면서.


아내와 나는 박윤석의 팬이다. 그는 키가 몹시 큰데도 거인이라는 느낌보다는 꾸부정하고 마른 체격 덕분에 뭔가 안쓰럽게 느껴지는 캐릭터를 가졌다. 딜레마에 빠져 안절부절못하는 역에 최적화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러키 역을 할 때는 끈에 묶여 나와 관객을 힘들게 하더니 이번엔 또 절름발이다. 하반신이 마비된 기주봉과 절름발이인 그는 어떻게 저 많은 대사를 다 외웠을까 싶은 양의 대사를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기주봉은 몇 번 머뭇거린 적도 있지만 박윤석의 대사 능력은 너무나 정확하다. 물론 베테랑인 기주봉의 딕션과 성량은 객석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창문을 통해 사람들이 사라지고 바닷가의 갈매기조차 보이지 않는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확인한 클로브는 햄을 버리고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가 결국 포기한다. 따지고 보면 딱히 갈 곳도 없는 것이다. 그들이 있는 공간은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957년에 초연된 연극은 지금 봐도 조금도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부질없는 걸 알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다루었다면 [엔드게임]은 막판에 다다른 인간들의 절망과 염원을 보여주는 희비극이다. 텅 빈 듯하면서도 꽉 찬 연극. 맨날 맥도널드나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 음식만 먹고 마시다가 최고의 셰프가 만든 요리를 맛본 기분이랄까. 잘 설계된 부조리극을 보는 쾌감을 원한다면 당장 이 연극을 예매하시라. 9월 6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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