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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11. 2020

우연을 빙자한 필연이 만든 아름다움

김탁환의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뜻있는 많은 이야기가 우연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우연이란 게 있을까. 턱밑까지 숨이 차올라서 일 년만 소설 쓰기를 멈추고 쉬기로 한 베테랑 소설가 김탁환이 곡성에 있는 '밥Cafe 飯(반)하다'라는 식당에 가서 농부 과학자 이동현을 만난 게 정말 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다. 두 사람이 꼭 만나야만 하는 천지의 조화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게 두 사람이 각자 가졌던 '멈추고 돌아보려는 마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평생 앞만 보고 달리다가 ‘이것이 과연 옳은 길인가?’ 하고 문득 멈춰보는 그 갸륵한 마음이 만든 필연인 것이다. 평생 이야기꾼으로 살기로 결심했던 소설가 김탁환은 땅에 매혹된 과학자 이동현을 만나 두 번째로 자신의 삶을 깨우는 시간과 만났고, 자신이 어눌하다고 생각하던 과학자 이동현은 이야기에 매혹된 소설가 김탁환을 만나 비로소 말문이 터진다. 전생의 인연으로 맺어진 남녀 사이도 아닌 주제에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보고 남은 길을 함께 걸어가기로 결심한다. 볍씨가 발아하고 모내기를 하고 풀을 뽑고 물뱀을 만나는 길마다 깊은 걱정과 탄식이 있고 벅찬 깨달음도 있지만 결국엔 "아름답지요?"라는 감탄사를 꼭 주고받게 된다. 그리고 우연을 빙자한 그 필연 덕분에 우리 또한 이렇게 아름다운 글과 이야기를 얻는다.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라는 글은 그렇게 곡성의 안개처럼 어느 날 아침 우리 앞에 펼쳐졌다.

김탁환은 언어를 다루는 소설가답게 카페 이름에 먼저 반한다. 그냥 발음만으로 반할 만한데 세상의 벽에 맞서겠다는 '반'의 숨은 뜻에 또 반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희망의 열매를 꽃피우는 곳'이라는 뜻의 회사 이름 '미실란(美實蘭)'에 반한다. 처음 접한 아름다움은 섬진강 뿅뽕다리에서 만난 물소리였다. 그리고 왕우렁이의 숨은 아름다움에 대해 깨닫고 나무로 만든 교실바닥의 아름다움에 대해 공감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살았던 동네나 다녔던 학교는 무조건 직접 찾아다니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김탁환 덕분에 두 사람은 남도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공통의 어린 시절을 다시 돌아보고 '돈 되는 것만 남기고  다 없애라'라며 효율만 강조했던 지난날의 지침 때문에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둘이 돌아다니며 반복해서 나누는 것은 볍씨나 발아, 모내기, 농부에 대한 이야기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글쓰기와 통하는 이야기이고 결국 인간 삶의 원칙과 본질에 관한 이야기, 연대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다. 비료를 많이 줘서 손쉽게 큰 벼들은 비바람에 쉽게 뽑힌다. 어떤 벼의 품종이 적합한지 알고 싶으면 대략 짐작하는 대신 우공의 마음으로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 인생과 그 인생을 다루는 소설의 묘미는 구상한 대로 펼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생각지 못한 반전이 펼쳐진다는 것은 인생의 보너스 같은 것 아닌가.

우리가 영화 제목으로만 얼핏 알았던 곡성은 알수록 신비한 곳이다. 원형이 겹치는 심청과 원홍장 이야기는 흥미롭고 청단마을에 가서 마루 밑 오사리를 찾아내는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다. 김탁환의 글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마다 곡성은 그렇게 더 아름다워진다. 김탁환은 그렇게 긴 소설을 어떻게 쓰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반복은 아름답다’는 문장을 떠올린다. 하루하루 꾸준히 써 내려간 글들이 장편소설이 되듯 날마다 씨 뿌리고 가꾸고 대화(!)하는 반복 속에서 벼는 자라 곡식이 된다. 이 과정에서 이동현은  ‘행복한 사람’이란 경쟁에서 이겨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평범하되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이 모든 건 곡성의 논과 들판을 다니며 김탁환이 배운 것인데, 쓰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진리를 이 책에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김탁환은 그냥 느끼고 감탄만 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참고도서와 논문들을 바탕으로 자신과 이동현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살려내고 있기에 그 울림은 더 크고 묵직하다. 간다 세이지, 김용택, 김종철, 마강래, 존 버거, 황윤, 이반 일리치, 장일순, 박원순, 박지원, 그리고 정혜신 이명수까지 이 책에 동원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책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꺼이 기뻐하리라.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라는 제목은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지키는 행위가 아름답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름다운 것은 모름지기 지켜내야 한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책을 들춰보면 곧 알게 된다.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반성과 통찰이 성실한 농부 겸 사업가와 소설가의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것을. 옳은 마음이 아름다움이 되고 성실한 반복이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을. 무엇이든 진실된 것은 아름답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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