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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19. 2020

제목 없이 쓰는 영화 리뷰

홍상수 [도망친 여자]


1996년 어느 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영화를 조조로 보기 위해 토요일 반차를 냈던(그 당시엔 토요일에도 출근을 해서 오전 시간을 각자 무의미하게 보내다 오는 풍속이 있었다) 이유는 씨네21 등의 영화 잡지를 통해 그 영화가'제법 잘빠졌다'는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신인감독인데 고집이 세서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현장에서도 진도를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령 그는 세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니면서 발로 차서 세트를 망가트렸다고 했다. 그럼 다시 만드는 수밖에 없으니 곧 세트 디자이너나 작업자들은 "저놈은 성격이 나빠서 지랄을 잘하니 그냥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빠르다."라고 합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 이런 악동 같으니라고. 나는 기대감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개봉 첫날 종로 2가에 있는 코아아트홀로 조조를 보러 갔다. 영화는 놀라웠다. 캐릭터들은 심각한 듯하다가도 빈틈이 많아 웃겼고 그들이 쏟아내는 대사는 매번 생소하고 문어체적이라 허를 찔렀다. 나는 조은숙과 김의성의 캐미가 너무나 좋았고 이응경이 제대로 '연기'를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 감독 이거 뭐냐. 그 후로 나는 홍상수의 팬이 되었다.

그는 전대미문의 방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시놉을 자세하게 써놓고 촬영 전날 배우들과 술을 마시며 길게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촬영장에 가서 스테프들이 카메라 세팅을 하는 동안 구석에 앉아 시나리오를 쓴다. 배우들은 전날 술자리에서 나눴던 말들이 영화 대사로 등장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다. 연기는 최대한 연기 같지 않게 해야 했고 소주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진짜 소주를 마셔야 했다. 옷도 평소 배우가 입던 옷을 배우의 집 옷장에서 골라오게 했다. 이렇게 해서 <강원도의 힘> <오!수정> <생활의 발견> 같은 이상하고 신기하고 웃긴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그의 영화가 재미없다고 느낀 것은 <다른 나라에서>부터였다. 여전히 찌질한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 건 똑같은데 그 방식이 진부하게 느껴졌다. <우리 선희>에서는 선희가 귀여운 건달 같아서 그나마 좋았다. <북촌방향>의 끊임없고 쓸 데 없는 수다들도 홍상수스러워서 좋았다. 김민희와 처음 만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는 감독이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점점 술 마시는 장면이 줄어서 걱정이었다. 섹스는 아예 사라져 버렸다. 꼭 술이나 섹스가 나와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소설보다는 수필에 가까운 이런 작은 영화를 보는 맛은 일종의 ‘관음적 시선’에 있는데 훔쳐보는 잔재미가 없으니 싱거워진다고나 할까.

<도망친 여자>는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친구들을 찾아다니는 여자 감희의 이야기다. 영화는 지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주 내용인데 일상적인 것을 넘어 솔직하지 못함의 퍼레이드처럼 느껴진다. 어쩌다 한 번 같이 잔 남자, 도둑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말라 말하는 남자, TV에 출연한 뒤로 잘나가지만 말이 매우 많아진(그래서 진실되지 못하게 된) 남자 등등 찌질한 남성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는 건 여전한데 이상하게 그닥 재미가 없다. 왜 그럴까. 너무나 생략이 많아서 그렇다. 이건 흡사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걸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어.’라고 얘기를 하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만들자마자 그 의미를 지워버림으로써 재미까지 사라져 버리는 형국이다. 홍상수는 ‘도망친 여자’라는 제목을 지어놓고 만족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의미 지우기 덕분에 제목의 즐거움도 퇴색되고 말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오!수정을 볼 때는 짜릿짜릿한 맛이 있었는데 이젠 그게 없다. 그리고 여성을 너무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이 정말 그렇게 얘기하고 행동하지 않는데 말이다. 김민희가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니다. 감독이 원하는 만큼의 연기와 아우라를 뿜어낸다. 물론 김새벽이 연기를 훨씬 더 잘 하지만(그런데 김새벽과 함께 있으니 김민희가 정말 예쁘긴 예쁘더라). 술도 소주가 사라지고 와인으로 바뀌었다. 등장인물들이 소주를 마시지 않으니 찌질함도 농도가 옅어지고 더 이상 농담도 등장하지 않게 되어 섭섭하다. 나는 리뷰 쓸 때 좋았던 작품만 쓴다는 철칙이 있는데 이번엔 그걸 어기게 되었다. 나빠서가 아니라 안타까워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을 안 달기로 했다. 이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의 느낌을 솔직하게 말하면 그 상은 영화가 아니라 홍상수에게 준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던 그 옛날의 홍상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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