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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an 25. 2021

숲에서 나오면 숲이, 사람에게서 나오면 사람이 보인다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

2035년쯤 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청소나 경비원,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일은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로 대체되지만 연재의 엄마 보경처럼 음식 솜씨가 좋은 사람은 그때도 여전히 닭볶음탕 가게를 운영하며 산다. 소설가 천선란이 상상한 세상은 경마장에 기수 휴머노이드가 도입된지 5년이 된 시점이다. 경마는 빠르게 달리는 말이 승리하는 경기이기 때문에 기수의 키가 작고 몸무게가 가벼울수록 유리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로봇 기수이리라. 그런데 어떤 연구원의 잘못 때문에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고 파란 하늘을 쳐다볼 줄 아는 로봇 C-27이 기수가 되고 그가 말에서 떨어져 고장 나는 바람에 '로봇 덕후'인 여고생 연재 곁으로 가게 된다. 그가 쓰고 있는 초록색 투구가 브로콜리랑 색이 비슷해서 이름은 ‘콜리'다.


최저시급이 1만 5천 원으로 오르는 건 누구나 상상할 수 있겠지만 '대학이 필수이던 시대가 한풀 꺾이면서' 주인공 연재가 소프트 로봇 연구 프로젝트에 도전한다는 설정을 쓴 걸 보면 이 작가의 트렌드 감각에 믿음이 가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대사나 관념적인 글들도 탄탄한 편이다. 특히 보경과 소방관의 꿈과 추억을 그린 문단의 문장들은 정말 백미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건 그가 로봇 콜리의 눈과 입을 통해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과 바람직한 미래를 얘기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작품은 연골이 닳은 경주마들은 멀쩡해도 쓸모가 없어서 결국 안락사를 당해야 한다는 비인간적인 처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연재와 은혜 남매는 콜리가 타던 말 '투데이'와 교감할 수 있는 감성을 가진 친구들이다. 거기에 합리적이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마방 관리인 도민주와 수의사 민복희, 기자 서우진 등이 더해진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살아있는 존재들의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관심이 있는 로봇 콜리가 있다. 투데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소설 맨 앞부분을 읽으면서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떠올렸다. 첫 장면에서 콜리의 최후를 다루는 모습이 무사 간이치로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써온 작가의 내공이 저절로 만들어낸 플롯일 것이다. 숲에서 나와야 숲이 보이듯 사람에게서 벗어나면 사람이 더 잘 보인다. 천선란은 휴머노이드 콜리의 눈과 지능으로 인간을 보는데, 그때마다 인간들은 속마음을 들킨다. 천선란은 SF에 우주전쟁이나 극한 상황, 악당이 나오지 않아도 재미있고 감동적일 수 있다는 걸 따뜻한 글로 보여주는 작가다. 요즘 읽은 소설 중 가장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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