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오후

방귀 때문에 쓰게 된 일기

by 편성준

어제저녁 일찍 잠이 들었다가 12시에 깨서 새벽 4시까지 혼자 마루에 앉아 책을 읽다 잤다. 조선희 선생이 쓴 두 권짜리 장편소설 [세 여자]였다. 순자가 와서 테이블에 놓은 내 물컵에 두 번이나 발을 담그려 시도하다 제지당했다. 아침 늦게 일어나 아내에게 이왕 늦은 거 산책을 좀 하고 아침 겸 점심을 먹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자기는 운현궁 맞은편에 있는 김치찌개집에 갔다가 북촌에 있는 유겸 언니한테 뜨개질용 삼베실을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다.
성북동에서 성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 운현궁까지 왔는데도 3Km 정도밖에 안 되어 금방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김치찌깨집엔 손님이 그득했다. 밥을 먹고 나와 북촌 쪽으로 걸으며 아내 말을 들어보니 내 옆에 앉아 김치찌개를 먹던 공무원 점퍼 남자는 점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소주를 한 병 달라하더니 소주병을 상 아래 숨기고 물컵에 소주와 물과 무슨 약을 타서 마시더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게 바로 위장술이네!” 하며 낄낄 웃었다.
유겸 씨 집 겸 공방으로 와서 커피를 얻어 마셨다. 아내가 가져온 시금치 약간과 삼베실을 꺼내자 유겸 씨가 왜 이걸 내게 다 주느냐며 나무랐다. 아내가 웃으며 자기는 뜨개질을 할 줄 몰라서 그렇다고 했더니 유겸 씨가 뜨개질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나는 마침 책을 가져왔으니 천천히 뜨개질을 전수하라 말하고는 옆 테이블로 와서 [세 여자]를 꺼내 읽었다. 이런 곳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의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고 나와 손을 씻다가 방구를 빵 뀌었는데 아내가 방구 소리를 다 들었다며 제발 남의 집에서는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유겸 씨가 “남자들은 방구 뀌지 말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자라서 그렇다.”라고 얘기하는데 그게 위로인지 비난인지 알쏭달쏭했다. 난 방구나 똥이 늘 문제다. 오늘도 아름답게 시작해서 지저분하게 끝나는 일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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