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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Feb 15. 2021

우리 인생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주는 영화 - [세 자매]

뛰어난 대사와 캐릭터 설정이 명연기를 이끌어낸 영화입니다

인생이 잘 안 풀리고 답답할 때 어떤 이는 친한 친구를 불러내 차나 술을 마시기도 하고 어떤 이는 혼자 점을 보러 가기도 한다. 그러나 절친이나 점성술사가 위안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극장에 들어가 보게 된 영화 한 편에서 나보다 더 큰 불행에 처한 인간들을 목격하고는 불쌍타, 아 씨발, 하다가 결국엔 주르륵 흐르는 눈물 뒤로 산뜻해지는 위로의 감정에 어리둥절해지기도 한다. 이건 아리스토텔레스가 무려 이천오백 년 전에 『시학』에서 말했던 카타르시스인데, 궁금한 사람은 당장 이승원 감독의 새 영화 [세 자매]를 보면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누구의 인생이든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씩 비극을 품고 있음을 잘 들추고 있다.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는 둘째 미연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지만 남편이 성가대 후배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괴롭고 그 와중에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와 술 취한 목소리로 푸념을 늘어놓는 셋째 미옥도 응대해야 한다. 꽃집을 운영하는 첫째 희숙은 반항적인 딸을 혼자 키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버는 돈은 족족 이혼한 남편에게 뜯기고 설상가상 자신이 최근 암에 걸렸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슬럼프에 빠진 극작가 미옥은 글이 써지지 않아 괴로운 데다 남편이나 의붓아들에게 잘해주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맨날 술과 과자를 입에 달고 사는 철부지 골칫덩어리 셋째 딸이다. 이게 세 자매의 프로필이라니, 이쯤 되면 가히 '불행 포르노'라 부를 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의심을 뒤집어주는 게 이승원 감독의 살아 있는 대사와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은 문소리는 '세상에 이런 영화도 좀 만들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제작까지 맡게 되었고 불교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연기를 위해 교회에 가서 몇 달을 살았다고 하니, 대배우의 그 노력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이승원 감독의 부인이기도 한 김선영의 연기야 이미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확인한 바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역시 명불허전이다. 그리고 모델 출신 장윤주는 기꺼이 김선영에게 연기지도를 자청함으로써 얼마 안 된 배우 생활의 정점을 찍어버렸다.


배우들의 연기는 뛰어나지만 감독이 후진 경우도 가끔 있는데 이 영화는 감독과 배우가 서로를 도운 케이스였다. 감독은 뛰어난 대사와 캐릭터 설정으로 마음 놓고 연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 배우들은 헷갈리는 일 없이 각자의 역할에 몰두하며 신나게 연가를 펼치다가 결국 아, 인간은 왜 이렇게 하나 같이 비극적인 존재인 거야, 하며 진심으로 오열하게 된다. 처음 영화가 시작될 때는 광신적인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건가 하는 생각도 했고 플래시백 장면을 볼 때는 또 어렸을 적 아버지의 폭력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고 하는 건가, 하는 의심도 했지만 모두 틀렸다. 이승원 감독은 가족이야말로 이 세상 비극의 원형인데 누구든 가족을 이루고 살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 운명을 피해 갈 순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 도저한 비극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것은 운명을 뒤집으려는 피해자의 강력한 의지가 아니라 '미안하다'는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임을 눈물로 알려준다. 영화에서 세 자매(와 한 명의 아들)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사과를 하는 대신 유리창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부딪히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상관없다. 우리는 이미 영화를 통해 어느 정도 사과를 받아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고맙다. 아내와 나는 올 설날에 이 영화를 보았다. 들어갈 때는 가족을 떠올리지만 나올 때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이 보석 같은 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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