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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Feb 11. 2021

김승희의 경우

구정 연휴에 읽기 딱 좋은 책_어머니의 음성같이 옛애인의 음성같이

고등학교 때 고스톱에 중독된 적이 있었다. 가방 안 깊숙이 화투 한 목을 넣고 친구들과 빈집을 찾아다니며 고스톱을 쳤는데 급기야 우리 집에서 치다가 엄마가 오시면 당황해서 얼른 담요를 접고 밖으로 나가는 식이었다. 내가 고스톱 치는 걸 알면서도 엄마는 하도 기가 막힌 지 아무 말도 안 하셨다. 나는 노름엔 참 소질이 없는 놈인데도 불구하고 한 번은 우리 집에서 꽤 많은 돈을 딴 적이 있었다. 친구들은 저 놈이 갑자기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 돈을 그냥 써버리는 게 아까워서 뭘 할까 고민하다가 엉뚱하게도 『현대문학』을 1년 치 구독해 버렸다. 그때부터 시작된 문학잡지 탐독은 대학에 입학하고도 계속되었는데 그렇게 잡지에서 읽은 그 달의 시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황지우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와 김승희의 <진주기르기 1>이었다. 특히 김승희는 고등학교 때 「문학사상」에 연재되던 <33세의 팡세>를  읽은 기억이 있어 더 반가웠다. 심야에 멍청히 제시카의 추리극장을 보며 양파링을 먹고 있던 시인의 이야기였던 이 시를 나는 '양파링을 먹으며'라고 기억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황망한 일이다.

어제 대학로 동양서림에 갔다가 아내가 "나, 이 책 살래.'라고 외치며 고른 게 『어머니의 음성같이 옛 애인의 음성같이』다. '김승희가 들려주는 우리들의 세계문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난다의 김민정 대표가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읽은 뒤로 지금까지 하릴없이(?) 손에 들고 있는 책이었고, 이제 혼자 읽기 아까워 보물을 공유하는 기분으로 다시 펴낸다는 책이다. 52명의 작가와 52명의 작품이 실려 있는 이 책은 이번 구정 연휴에 읽기에 딱이라는 게 아내의 독전 평이다. 아내와 나는 연휴에 이 책을 읽은 뒤에 할 일 또한 분명해진다. 책에 나오는 작품들을 일주일에 한 권씩 사는 것이다(일주일에 한 권씩 읽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마침 일 년이 52주다. 이거 참 신기한 일 아닌가!


진주 기르기1  



김승희


심야에, 멍청히,

제시카의 추리극장을 보며

누워 있는데

긴급한 파발마 글씨로

하얀 자락이 달려간다.

RH마이너스 B형 혈액을 급히 찾습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 392의 0161

응급실로 빨리.


나는 RH마이너스 혈액이

없어서

그냥 누워서 양파링을 바삭바삭

먹으며

TV를 본다.


누가 나를 불렀나?

유리창에 가득 찬 밤이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 같아

등을 돌리고 누우며

홀로 한번 더 말해본다

나, 는, R, H, 마, 이, 너, 스, 가, 아, 닌, 데, 뭘.


그렇게

80년대는 저물고

피 한 방울 손해보지 않은 나는

그 시대에 피 한 방울 보태지 않은 나는

양파링처럼 너무도 유순하게

누군가의 깊은 목구멍 속으로

자꾸만 녹아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녹아버려도 좋은 것일까

이렇게 삼켜져도 되는 것일까

몸속에 자꾸만 돌이 쌓여가는 기분으로

잠들었다가

(목구멍까지 돌이 차오르면

우린 행복하게도 잠수성공 익사성공

을 이룰 수도 있었을 텐데)


아, 안 돼, 잠옷 같은 수의를 떨치고

바람 같은 신발을 신고

어둠의 눈물 묻은 대문을 나서며

나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이 있다는

새벽의 방향으로

푸르게 푸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내 비록

R, H, 마, 이, 너, 스, B, 형, 피, 는, 없, 지,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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