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vvy’s table
재작년 회사를 그만둔 이후 언제인가부터 아침식사 시간을 바꾸었다. 예전에는 아홉 시 정도면 밥을 먹었는데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책을 읽거나 뭔가를 쓰거나 하며 노는 걸 좋아하니까 아내가 아침 겸 점심식사 시간을 11시로 바꾸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하루 두 번의 식사로 리추얼이 바뀐 뒤로 더 편하게 새벽 아무 때나 눈이 떠지면 마루로 나와 책을 읽는다. 가끔은 글을 쓰기도 한다. 일곱 시쯤 출출해지면 물에 타 먹는 캐비초크와 개별포장 낫또로 요기를 하고 동네 세븐일레븐에 가서 1,500 원짜리 뜨거운 커피를 사 오기도 한다. 이렇게 리추얼을 바꾸니 아침 시간이 더욱 소중해진다. 아내는 설사 일찍 눈을 떴더라도 자리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거나 하며 게으르게 뒹굴다가 10시 반쯤 밖으로 나와 부엌일을 시작한다. 그러면 혼자만의 시간은 끝이다.
한 사람은 식사 준비를 하고 다른 사람은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함께 한 공간에 있으면서 대화를 하지 않는 건 소원해진 사이이거나 무관심한 경우인데 우리 두 사람에겐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으니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이 소중하다면 둘이 함께 나누는 소소한 대화 역시 소중하다. 더구나 요즘 전쟁만큼이나 두렵고 지루한 코로나 19 상황에서는 아내가 절대적인 아군이다. 아군끼리 어떻게 대화를 안 하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 리디북스에 들어가 책을 한 권 샀다. 다니엘 켈만의 『명예』라는 단편집이다. 책은 재미있는데 갑자기 너무 피곤했다. 이런 경우엔 망설일 것 없이 다시 자리에 가 눕는다. 내가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더니 아내가 오늘 자신은 꽃 수업을 가는 날이라 열 시엔 나가야 하니 밥을 조금 일찍 먹자고 했다. 알았다고 하고 눈을 감았는데 금방 밥 먹으라고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무 졸려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한숨을 내쉬더니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조금 후에 "밥상 차려놨으니까 이따 혼자 먹어. 인덕션 위에 있는 밥 가져다 먹고."라고 하고 아내는 밖으로 나갔다. 10시쯤 고양이 순자가 내 가슴팍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눈이 떠졌다. 화장실에 갔다 스마트폰을 꺼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정월대보름이라고 차려 놓은 특별 메뉴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인덕션 위 찜통 안에 들어 있는 잡곡밥은 따뜻했다. 나는 인덕션 위의 밥을 가져다 먹기 시작했다. 김과 가지, 호박꼬지 등의 나물들이 잘 어울리는 밥상이었다. 호두 두 알도 담아놓은 걸 보고 잠깐 웃었다. 부럼을 깨야 한 해가 건강하다는 말을 믿기로 하고 호두를 깨서 먹었다. 아내는 지금쯤 꽃을 만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배가 불러서 기쁘고 아내는 꽃을 만지고 있으니 기쁠 것이다. 비록 함께 밥을 먹진 못했지만 함께 기뻐했으므로 그리 나쁘지 않은 정월대보름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