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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Feb 28. 2021

물리학자가 SF 소설을 쓰면

이종필의 『빛의 전쟁』

이종필 교수는 아내 때문에 이전부터 페이스북 친구로 알고 지내던 분이었다. 평소 물리학 이외에도 드라마나 영화, 시사에 대한 글들을 많이 쓰는 사람인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작년에 마스크 대란 때 올린 글이었다. 정부의 준비에 문제가 있어서 마스크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는 여론이 들끓을 당시 이종필 교수는 '1년에 한 번 놀러 올까 말까 하던 친척들이 한꺼번에 본가에 놀러 온 상황'을 예로 들면서 그 아무리 준비성 있는 집이라고 해도 이렇게 예외적으로 한꺼번에 친척들이 몰려오면 방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펼쳤는데 그 메타포가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신묘했다.


그러던 그가 첫 소설을 냈다고 해서 구입했다. 제목은 『빛의 전쟁』이었다.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위로 드론 몇 대가 힘을 합쳐 목 없는 시체를 걸어놓고 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물리학자 조성환은 기자인 하영란, 경찰 윤태형 등과 함께 이 엽기적인 사건을 파헤치게 되는데 그 내막엔 문혜진·홍경수 과학자 커플과 국정원, 국가안보국(NSA) 그리고 일본 야쿠자까지 줄줄이사탕처럼 연결이 되어 있었다. 일단 월요일 아침에 발생한 사건은 이주일 정도 아주 숨 가쁘게 전개된다. 천재적인 뇌과학자들과 양자컴퓨터, 인공지능 등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핵심 정보만 보존되어 있으면 과거를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다'는 과학 논리를 이용해 1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을 동영상으로 투시하는 지경에 이른다. 물리학과 인공지능에 기초해서 전개되는 스토리인 만큼 인공지능 알고리즘인 'GAN'은 물론 슈뢰딩거의 고양이, 큐비트, 유니터리 변환, 양자얽힘 등 생소한 용어들이 난무한다. 거기에 스티븐 호킹 박사나 아인슈타인이 남긴 말, 국정원 마티즈 사건 등 기존에 있던 시사 상식이나 사건들이 적절히 인용된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 과학이 엄청 발전했다는 가정 하에 쓰인 일종의 SF소설이다. 100년 전 명성황후 시해 사건까지 과학의 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물리학자 홍경수는 일본 역사를 법정에 세우고 싶어 물리학에 매진했으며 그 연장선에서 '우르드 프로젝트'를 실행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집념을 선보이는데, 이는 가문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IT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인물이 등장하던 심윤경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비밀주의와 과학은 양립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주인공 조성환의 믿음은 그대로 작가 이종필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소설에서처럼 과학을 국가 기밀로 묶어놨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폐해에 대해 아주 드라마틱한 경고를 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조성환이 후배 이창규 박사와 공유하는 비밀장소로 명동에 있는 당구장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이 나올 땐 나도 모르게 대학생 때 다녔던 홍대 앞 당구장들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스마트폰 따위는 없었던 1980년대 중반 스무 살의 불안과 조용하고 느리게 시간이 흐르던 당구장 안의 그 밀도와 정서는 정말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기억이이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너무 캐릭터에 꼭 맞는 역할에만 충실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있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화오엽'의 존재는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를 떠올리게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변호사 출신의 존 그리샴이 멋진 법정 스릴러를 썼듯이 물리학자 출신의 이종필도 앞으로 물리학에 기반한 탄탄한 SF를 계속 써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품게 되는 데뷔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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