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서 할 수 없이 마신 낮술

구포국수 간 날

by 편성준

새벽에 눈을 떴다. 여섯 시도 안 돼 편의점에 커피를 사러 갔더니 사장님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느냐며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셨다. 집에 와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 온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읽다가 배도 고프고 졸려서 안방 아내 곁에 가 다시 누웠다. 새벽부터 계속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내일 가져오시는 기획서엔 프로젝트마다 각각의 작곡이 다 되어 있어야 하는데요."라는 클라이언트의 말도 안 되는 주문을 듣고 경악하는 꿈을 꾸다가 깼다. 내가 자면서 비명을 지르더라면서 아내가 왜 그랬냐고 묻길래 클라이언트와 작곡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주문 얘기를 했더니 "나쁜 클라이언트네!"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잠깐 코를 골며 자다가 일어나 보니 아내는 TV로 삼일절 기념식을 다 보고는 배가 고프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내게 아침 식사를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면서 '낮술 하기 참 좋은 날씨'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건 단순한 의견 표명이 아니라 낮술을 마시자는 명령에 다름없다는 것을 나는 오랜 공처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가자고 했더니 아내는 이왕 마실 거면 구포국수로 가자며 구체적인 좌표를 제시했다. 비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아서 각자 우산을 하나씩 받쳐 들고 구포국수로 갔다.

아내가 서빙하는 아주머니에게 집에서 가져간 개별 포장 과자를 꺼내 드렸더니 매우 좋아하셨다. 우리는 수육과 잔치국수, 그리고 한라산 한 병을 시켰다. 돼지고기를 잘 못 먹는 아내 덕분에 접시에 놓인 수육은 거의 다 내 차지였다. 수육 먹는 속도에 발맞추느라 한라산을 좀 급하게 마셨더니 아내가 "나는 소주를 두 잔밖에 안 마셨는데 벌써 한 병이 다 비었다."라며 소리를 질렀다. 가게 안에 있는 손님들이 다 우리 테이블을 쳐다보자 아내가 너무 소리를 질러 미안하다며 나에게 사과를 했다. 카톡을 들여다보던 아내가 오늘 임정희 목수님 생일이라며 선물을 하라고 명령하길래 무슨 오만 원짜리 소고기 세트를 선물로 보냈다. 임정희 목수님이 바로 고맙다며 "이런 귀한 선물을..."이라는는 답장을 보내와서 나도 "고맙긴요. 목수님이 젤귀." 같은 가증스러운 문자를 주고받았다.

지난 1년 간의 여러 가지 일들과 그전에 성북동 윗동네에 살던 얘기를 했다. 아내는 어제 동네 사는 이웃 세미 씨네 집에 가서 장 담근 얘기를 했다. 세미 씨가 장을 담그게 되어 너무 좋다고 했고 그녀가 장 담그는 걸 유튜브에 올릴 수 있도록 동영상을 찍어준 것도 잘 한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내가 메뉴판을 다시 살피길래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두부김치나 먹을까, 해서 두부김치와 한라산 한 병을 또 시켰다. 새로 소주병을 따긴 했지만 이미 배가 불러서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창밖으로 비 오는 모습이 좋아서 내가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15초간 찍었다. 오랜만에 하루 종일 비가 오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안주를 싸 달라고 부탁하고 한라산까지 챙겨 집으로 왔다. 아내는 집으로 와서 고양이 순자를 좀 괴롭히며 놀았다. 아내는 순자가 나만 좋아한다며 생트집을 잡았다. 이럴 땐 순자와 내가 같은 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고 있다. 모처럼 좋은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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