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같았던 만우절 이야기
10년 전 오늘, 나는 매우 화가 나 있었다. 바보처럼 어떤 술자리에 끌려가 비싼 소주를 마셨기 때문이다. 술값은 무려 50만 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당시 프리랜스 카피라이터였던 나에게 포스터 제작 건을 맡긴 디자인업체의 대표가 이른 저녁부터 느닷없이 나를 호출해 술을 사 준 것이었다. 그는 신사동에 있던(지금은 없는) 부침개집에 가서 소주를 따라 주며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미안하지만 카피료를 50만 원만 깎아줄 수 없겠느냐' 물었고 나는 흔쾌히 웃으며 그러자고 했다. 술을 다 마시고 헤어지고 나서야 그 소주가 50만 원짜리였음을 깨달았다. 나는 혼자 분하고 창피해서 어디 가서 딱 한 잔만 더 하기로 마음먹고 가로수길에 있는 단골 바(지금은 없는)로 갔다. 당시 그 바에 생맥주 탱크가 있었기에 가서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집으로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바에 들어가 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바텐 앞에 앉아 생맥주 500cc를 시켰더니 내 옆에 어떤 여자가 혼자 앱솔루트 보드카를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약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술도 두 잔 얻어 마셨다. 그녀의 이름은 윤혜자라고 했다. 나는 오늘 너무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술을 더 마시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했고 그녀는 웃었다. 우리는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한 달 반 만에 다시 만나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우리는 늦은 나이에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연애하고 동거하고 결혼식까지 하며 유치찬란하게 살았다. 결혼하기 직전, 출판기획자인 그녀는 나에게 책을 한 권 쓰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책의 제목은 '늦은 연애는 없다'였다. 그러나 나는 다시 광고회사에 취직을 했고 책을 쓰기엔 너무 바빴다. 시간이 흘렀고 '연애에 나이가 어딨냐, 연애를 하는 건 언제나 신상에 이롭다'였던 책의 컨셉은 '좀 바보 같이 살아도 큰일 안 난다, 미루지 말고 지금 놀자'로 바뀌었다. 작년에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라는 첫 책을 냈다. 오늘은 아내를 만난지 10년 되는 날이다. 생각해 보니 그 디자인업체 사장이 50만 원짜리 소주를 사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우절인 그날 단골 바에 가지 않았어도 아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10년 전 몇 개의 우연이 겹쳐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앞으로 또 어떤 우연이 우리를 만들어갈까. 기대해 보자. 인생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