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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03. 2021

새벽 세 시, 편의점 사장님과 가짜 딸

성북동 소행성의 편의점 라이프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노는  좋아한다. 일찍 일어난다고 특별히 중요한 일이나 노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을 켜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점검하고  뒤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논다. 놀다가 졸리면 다시 자면 된다. 회사 다닐  엄두도  내던 일인데 이제는 전날 술을 엄청 마시지만 않으면 언제나 누릴  있는 사치가 되었다. 새벽엔 전화나 문자를 보내오는 사람도 없고 아내도 일어나기 전이라 온전히  혼자 지낼  있는 시간인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동네 편의점인 세븐일레븐으로 커피를 사러 가는 것이다. 집에서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실 수도 있지만 아침마다 커피를 사러 편의점까지 가는 게 즐거워서  이쪽을 택한다. 어쩌면 커피 맛보다 매일 아침 일찍 편의점에 가서 사장님과 의례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말의 싱거움이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는 거의 리추얼이 되어 편의점 사장님도 아침이면 은근히 나를 기다리는 눈치다.


오늘도 편의점 사장님에게 인사를 하고 커피를 내렸다. 그런데 사장님이 방금 계산을 마치고 나가 승용차에 올라타는 여성 손님을 보더니 씩 웃는 것이었다. 왜 웃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나에게 "술꾼 아가씨가 아침엔 멀쩡하게 운전하고 다니는 게 신기해서요."라고 말한다. 내가 무슨 얘기냐고 재차 묻자 사장님이 어느 날 새벽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 준다. 하루는 새벽 세 시쯤 편의점 앞에 택시가 서고 앞좌석에서 여성 손님이 뛰어내려 곧장 편의점으로 들어오더니 사장님을 와락 껴안으며 "아빠!"라고 외치더라는 것이다. 아빠, 아빠...라고 부르며 자신을 껴안는 여성을 자세히 보니 단골손님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당신의 아빠란 말인가, 라는 눈으로 묻자 그 여성이 다급하게 말했다. "사장님, 제가 오늘 회식을 해서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자꾸 저를 만지려고 하고 이상하게 굴어서, 우리 아빠가 편의점 사장님이다, 저기 저 가게다, 하고 내렸어요. 죄송해요."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사태를 단박에 눈치챈 사장님이 밖으로 나가 택시기사에게로 갔다. 기사는 택시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사장님에게 그는 "손님이 많이 취한 것 같다."라고만 하고 택시비는 안 받겠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택시 기사가 손님이 술이 취했다고 하면서 택시비를 안 받겠다니, 이상한 일 아닌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라고 묻는 나에게 사장님은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요? 기사는 운전하고 갔고 그 아가씨는 걸어서 집으로 갔지."라고 말한다. 자신이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긴 한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경찰에 신고부터 할 수도 없거니와 기사를 붙잡고 더 심문을 할 수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무엇보다 사장님은 그냥 편의점 사장님이지 그 여성의 아빠가 아니지 않은가. 서로 알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 편의점은 그런 곳이다. 남들이 다 잠든 한밤중이나 새벽에도 조금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조금 안쓰럽지만 자세한 사연은 모르는 이들이 드나드는 곳.


편의점은 현대판 아라비안 나이트가 쓰여지는 장소다. 내가 아는  중에도 편의점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있는데  분은 문장력이 좋아서 가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매일 재밌게 써서 올려준다. 나는 그걸 읽으면서 킥킥대기도 하고 살짝 씁쓸해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밤이 되면 모두 불을 끄고 잤지만 1980년대  편의점이 생긴 이후로는 전국 어디나 대낮 같이 불을 밝힌 편의점들이 깨어 밤을 지킨다. 한밤중에도 생각이 나면 곧장 술이나 담배를 사러   있으니 좋은 세상이긴 하다. 하지만 어쩌면 새벽까지 환하게 만든  불빛만큼 우리가 가진 슬픔의 양도 조금  늘어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쓸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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