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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04. 2021

시인은 '감탄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시집

오인태 『슬쩍』

해체시가 등장한 이후로 시는 길어져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처덕처덕 군말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시를 위해 좋은 일이기도 하고 나쁜 일이기도 했죠. 시대를 잘 만난 수다쟁이 시인들은 벌처럼 뚱뚱해진 몸에 독침 대신 날개와 입을 달았지만, 아주 오래전 노래와 시가 구별되지 않던 시절부터 구전되던 짤막한 시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월의 시처럼 몇 마디 안 해도 인생이나 사랑, 허무, 비전이 액기스로 거기 다 담겨 있지 않느냐,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반듯한 시집을 펼쳐도 그럴 기회는 뿅망치 앞의 두더지처럼 나타났나 하면 바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오인태 시인의 시집 『슬쩍』이 나온 겁니다. 반가운 마음에 『슬쩍』을 슬쩍 넘겨보니 '시인이란 도대체 어떤 자들인가' 고민하던 저의 질문에 맞는 답이 표준전과처럼 딱 들어 있더군요. 제 고민을 알고나 있었던 사람처럼 오인태 시인은 에두르지 않고 바로 답을 내놓습니다. 시인은 바로 '감탄하는 사람'인 거죠. 저녁놀이 저렇게 아름다웠나 감탄하고, 꽃이 저렇게 아름다웠나 감탄하는 사람. 사람이란 이렇게 따뜻한 존재구나 하고 감탄하는 사람. 감탄이야말로 시인의 몫인데 오인태는 그 어려운 걸 해냅니다. 일단 「품」이라는 시를 보십시오.



그 많은 탱자나무 가시가 그 많은 탱자를 상처 하나 내지 않고 품고 있다니


탱자나무를 그렇게 여러 번 쳐다봐도 이 생각을 한 사람은 오인태가 처음일 겁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오인태는 멍게를 먹는 것도 첫 키스를 추억하는 것과 같다는 감탄의 논리를 펼치죠. 그런데 읽어보면 이는 논리가 아니라 감각의 세계이기에 참 명제가 됩니다.


멍게  


좀, 달짝지근하고

좀, 떫고

좀, 시큼하던


첫 키스


모두들 황당해하고 지겨워하는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에서도 그의 감탄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마스크 덕분에 존재 가치가 올라간 귀를 보고 감탄하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워 !


안경을 쓰고 다니면서도 몰랐는데

마스크를 걸고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입, 닥치고서야 비로소 들리는

저, 가쁜 숨소리들


시는 겉만 번지르르할 것이 아니라 읽고 듣는 사람의 가슴에 가서 꽂혀야 제맛이라고 단말마 비명을 "앗!"하고 지르거나,  


씨앗, 또는 詩앗


싹 틔우지 못하는 씨앗을 얻다 써

단, 한사람 가슴에도 꽂히지 못하는 시를 뭣 하러 써


남들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고 말하는 지금이야말로 서정시 쓰기 좋을 때라 느닷없이 감탄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서정시를 쓰기 좋을 때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니

인민이 슬프면 시인도 슬프니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니

네가 슬프면 나도 슬프니


쓰다 보니 들려주고 싶은 시들이 너무 많지만 그러면 시집을 안 살게 뻔해 이쯤에서 그칠 테니 서점에 가시거든 '슬쩍'이라는 수상쩍은 제목부터 찾으십시오. 그리고 시집을 들고 남해 한 번 갈 계획을 세우십시오. 거기 지리는 어떤지, 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시집에 자세히 디 나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구요.


남해에 오시려거든


사월에 오시다

제법 해가 길어진


정오쯤 미조포구 도착해서 도다리쑥국이든 멍게비빔밥이든 시장한 마음 점 하나 찍고 조선소 앞 오인태 시비도 둘러보고


좌로 돌면 동백꽃 오십 리

우로 돌면 유채꽃 오십 리


때마침 앙등하는 치자꽃 향기와 고샅마다 멸치액젓 달이는 냄새와 건들건들 비릿한 바람과 잠깐, 유채나물 겉절이라도 무친 알싸한 몸내와


얇은 시집이 샤르르 넘어갑니다. 시도 다 짧아서 어린애 옹알이처럼 입 안에 다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면 마음에 콕콕 찍힌 점 때문에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오인태를 감탄하는 저도 어느덧 약간은 시인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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