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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25. 2021

아주 고급한 문화생활의 한 예

국립무용단 신작 ‘산조’ 리뷰


며칠 전 지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요즘 우리 집이 닥친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해 말했더니 "그래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를 보면 두 분은 늘 문화적으로 윤택한 삶을 누리시던데 그런 소릴 하시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한숨을 내쉬며 우리가 책이나 연극·영화·콘서트 등을 조금이라도 적은 돈으로 만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아울러 지인이 언급한 '문화적 소비'와 '좋은 식재료'를 제외하면 다른 소비를 얼마나 절제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실제로 아내와 나는 지난 1월부터 지금까지 새 옷이나 신발을 전혀 사지 않았던 것이다. 굳이 이런 궁상맞은 소리를 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억울한 마음이 들어 그런 설명을 하고는 곧 후회했다.


어제는 그런 문화적 소비 중에서도 아주 고급한 날이었다. 국립극장에 가서 최진욱 안무 - 정구호 연출의  국립무용단 신작 ‘산조’를 본 것이다. ‘산조’는 국립무용단이 4년 만에 해오름극장 무대에 올리는 대형 신작인데 30% 할인된 가격으로 나온 작품이었다. 아내가 국립무용단의 총 예술감독 손인영 선생의 지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궁금했던 건 전방위 크리에이터이자 '컨설턴트'인 정구호의 연출이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핵심을 정리해서 간단하게 보여줘야 한다' 정구호의 평소 지론은 무대 위로에서 빛났다. 특히 무대 왼쪽으로 내려온 지름 6m 대형 바위부터 압도적이었다. 흩어짐과 모임의 조화라 일컬어지는 산조의 국악 가락은 무용수들의 세련되고 절제된 동작에 맞춰 이어지다가 음악이 일렉트릭으로 바뀌면서 바위 대신 날카로운 삼각형 구조물이 배경에 등장했다. 바위가 자연이나 전통을 의미했다면 삼각형은 인공과 현대를 상징하는  같았다. 무언가   보여주고 싶을수록  비워 놓아야 한다는 역설을 정구호의 무대에서 다시 확인할  있었다.    LG아트센터에서 보았던 피터 룩의 ‘마술 피리 생각났다. 마지막까지 원형 LED 말고는 별다른  없었던 아주 미니멀한 무대 장치 안에서 무용수들은 때로는 고혹적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정교하면서도 자유로운 춤사위들을 보여주었다. 전통 산조를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한 음악은 한국인 최초로 그래미상을  번이나 수상한 황병준 음악 프로듀서의 작품이었다.  시간 반의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서 힘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저렴(?)하면서도 멋진 공연이  사흘간만 펼쳐진다는  괜히 아쉬울 지경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와 로비에서 얼핏 목격한 정구호의 모습은 뿌듯하면서도 겸손한 표정이었다. 삼성이나 제일모직 같은 대기업에서 숱한 전설을 만들었고 이젠 이렇게 멋진 무용극의 연출과 무대·의상·영상디자인까지 도맡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원래 같이 보려고 티켓을 예매했던 후배 이소영이 사업 때문에 며칠 밤을 새우는 바람에 못 오고 대신 강순희 선생을 급하게 모셨는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밤 9시에 장충동 길을 걷던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먹자골목 입구에 있는 주꾸미집으로 들어가 사정을 말한 뒤 딱 10시에 일어나기로 약속하고 주꾸미 이 인분과 계란찜을 시켰다. 공연도 좋고 주꾸미와 계란찜도 맛있었다. 카스 한 병과 진로 빨간 뚜껑 두 병을 다 해치우고 일어난 시간은 정확히 9시 59분이었다. 음식값을 내려고 시도했다가 강순희 선생에게 저지당했다. 아내와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산조'는 어제인 6월 24일부터 토요일인 2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상연하니 기회가 되면 꼭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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