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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l 07. 2021

아리랑고개에 오신 팀 버튼 감독

성북동 소행성 일기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운 도서관은 아리랑고개에 있는 아리랑도서관이다. 일제강점기에 춘사 나운규가 이곳에서 영화 <아리랑> 찍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여기 와서 책을 빌려 읽는다. 때로는 책상에 웅크리고 앉아 원고를 쓰기도 한다. 도서관의 서가는 서점과는  달라서 잊고 있던 옛날 책들을 쉽게 만난다는 장점이 있다. 가령 한때 유명했던 베스트셀러  『잃어버린 너』나  『논리야 놀자』 같은 오래된 책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꽂혀 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책꽂이 사이를 서성이다가 보물 같은 책들을 발견한  책상에 가져가 읽는  너무나  즐거움이다. 이성 선생의 기가 막힌  쓰기 아포리즘 창고 『무한화서』를 비롯해 스티븐 킹이 썼지만 영화로만 보았던 <쇼생크 탈출> 원작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같은 소설을 메모까지 해가며 꼼꼼히 읽고  조이스 캐롤 오츠나 옥타비아 버틀러 같은 대가들의 소설을  권씩 몰아서 읽는 맛은 각별했다.

어제는 아리랑도서관에서 10월에 있을 ‘과학 저술가들을 위한 글쓰기 특강'의 강의 초안을 만들었다. 소설가 정유정과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의 대담집을 반납했고 시간이 없어서 몇 달 전 읽다가 반납했던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을 다시 빌렸다. 대학 동기 여자애가 전화를 했길래 밖으로 나가 통화를 하며 우는 소리를 좀 했고(부부가 둘 다 잘 놀고 있긴 한데 돈이 걱정이라 걱정이다) 세븐일레븐에 가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다가 도서관 마당에 서서 마셨다. 다시 2층 열람실로 들어가다가 정수기 앞에 있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가로등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가로등은 덩굴식물을 어깨와 머리에 두른 채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는데 어쩐지 팀 버튼의 영화 주인공 같았다. 한때 『크리스마스 악몽』이나 『유령 신부』 같은 그의 스톱 애니메이션 영화에 얼마나 열광했던가. 그런데 아리랑고개에 나타난 팀 버튼이라고 생각하니 일단 너무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어제는 대학 동기의 전화 말고도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 때문에 자정 너머까지 한바탕 심란한 소동을 치른 날이기도 하다. 설마 팀 버튼을 만나서 그런 건 아니었을 테고 내일은 나아지겠지.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으니까 인생은 살 만한 것 아니겠는가.

오늘 아침엔 후배가 부탁한 일 때문에 윤 감독과 통화를 했다. 총예산 천만 원짜리 일인데 할 수 있겠냐, 는 나의 질문에 윤 감독은 "형님, 요즘은 천만 원이든 이천만 원이든 예산에 맞춰 일을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무 일도 못해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힘들어도 늘 웃을 줄 아는 윤 감독이 나는 참 좋다. 아내는 어제 시작한 진도 미역 다시마 공동구매 덕분에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고 나는 읽다가 잠깐 멈췄던 편혜영의 『죽은 자로 하여금』을 다시 읽는다. 이번 주 토요일 '독하다 토요일'의 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노트북을 무릎에 놓고 마당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순자가 방충망 문을 능숙하게 앞발로 열더니 "야옹~"하고 뛰쳐나온다. 순자는 요즘 아주 마당 고양이가 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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