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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pr 14. 2019

노라는 왜 그 집으로 돌아갔을까?

연극 [인형의 집 Part2]  리뷰

속편을 만드는 건 치사하고도 위험한 일이다. 성공했던 전작을 등에 업음으로써 대중의 주목을  받기 쉽다는 점에서는 치사하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작을 넘어서는 속편이 드물다는 면에서는 매우 위험한 행보라 할 수 있다. 내 기억으로는 프란시스 포드 코플라의 [대부2] 정도가 자신의 원작을 넘어선 작품으로 평가되는 드문 예가 아닐까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속편도 있었고 [타짜]의 속편도 있었지만 죄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극작가 루카스 네이스는 왜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너무나도 유명한 입센의 [인형의 집] 속편을 썼을까. 그리고 왜 LG아트센터는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백여 년 전에 자신을 삶을 찾겠다고 집을 나감으로써 세계 모든 여성의 '자아 찾기' 아이콘이 되어버린 페미니즘 슈퍼스타 노라. 그녀가 왜 15년 만에 다시 남편 토르발트를 찾아오는지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면 이 연극은 하나의 해프닝에 그칠 것이라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무대는 크고 미니멀했다. 무대 중앙에 아주 커다란 현관문이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노라와 유모 앤 마리, 그리고 남편 토르발트와 그들의 막내딸인 에미는 구석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옮기거나 앉음으로써 관객들을 온전히 배우들의 대사와 동작에 집중시킬 수 있었고 이는 '서로의 입장 대결과 설득'이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이 연극의 주제를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노라가 왜 이 집으로 다시 돌아왔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의문은 금세 풀린다. 노라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토르발트에게 뭔가를 요구하기 위해 들른 것이다. 집을 나가 필명으로 결혼제도를 비판하는 글을 써서 인기 작가가 된 노라는 15년 만에 자신의 남편 토르발트가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책 덕분에 아내에게 이혼을 당한 어느 판사가 그동안 그녀가 벌인 저작 활동과 말들, 연애 등이 모두 법적으로 사기행각에 해당됨(독신이라 주장했던 노라가 사실은 결혼 상태였으니까)을 통보하고 그녀가 언론에 그것에 대해 사과의 글을 게재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노라가 토르발트에게 이혼을 요구하면 되지 않느냐고? 당시엔 남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이혼을 할 수 있었지만 여자들은 남편의 부정이나 폭력성 등을 명확하게 증명하지 못하면 이혼을 요구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었기 때문에 노라는 다시 토르발트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운동장이 평평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연극은 19세기 '노라의 컴백'이라는 사건을 통해 21세기 현재 남녀평등과 인권 감수성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배우들의 연기가 빛났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무대 위에서 백 년 전의 의상을 입고 번역투의 긴 문장들을(더구나 페미니즘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대에 그걸 조목조목 설명해야 하는)  대사로 소화해 내는 게 쉽지는 않을 법한데 노라 역을 맡은 서이숙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물론 초반엔 대사들이 조금 교조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중간엔 대사와 액션이 조금 어긋나기도 했지만 풍부한 성량과 분명한 발음으로 시대를 오가는 노라를 현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토르발트 역을 맡은 박호산. 노라 역을 맡은 서이숙이 작품의 진지함을 이끈다면 토르발트 역의 박호산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연극에 유머라는 윤활유를 담당하는 소중한 자산이다. 노라가 쓴 책에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토르발트의 모습은 영화 [맨하탄]에서 헤어진 아내 메릴 스트립을 길에서 만나 자신과의 결혼생활을 책으로 왜곡했다고 화를 내는 우디 앨런의 모습과 정확히 겹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면을 보면 토르발트를 미워할 수는 없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다만 입장이 달라 서로에게 '악역'이 되는 것뿐이다. 연극 [인형의 집 Part2]는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페미니즘'이나 '대의명분'이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필요 때문이라는 당연한 사실에서 출발하기에 좋은 연극이다. 그리고 그런 상투적인 출발에 비해 매우 성숙한 결론에 도달하는 주인공의 모습들이 의외의 뿌듯함을 선사하는 멋진 작품이다. 막이 내리기 전에 얼른 극장으로 달려 가시라. 절대 후회하지 않을 웰메이드 작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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