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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01. 2021

더 좋은 답을 원한다면 질문부터 바꿔라!

아이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의 관계

보름 전 어떤 광고 공모전에 프리젠터로 참여하는 기회를 얻었다. 예전 회사 동료였던 CF 감독이 급하게 카피를 써달라고 연락을 해오는 바람에 경북 안동 체화정에서 돌아오던 날 밤 쉬지도 못하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각운을 살린 카피가 빛을 발했는지 운 좋게도 결선에 진출했던 것이다. 감독은 이게 얼마 만에 결선 진출이냐고 하면서 기뻐했다. 결선에 오른 팀은 모두 네 회사였는데 코로나 19 거리두기 조치 때문에 PT는 줌으로 이루어졌다. 주최측도 줌은 처음이라 그런지 다들 헤매는 눈치였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접수한 순서대로 PT가 진행되었다. 두 번째로 나선 내가 아이디어를 십 분간 열심히 설명하고 나자 심사위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대체로 긍정적인 질문이었는데 마지막 심사위원이 삐딱선을 탔다. '이 안이 아이디어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해 요소가 너무 많지 않느냐는 지적까지...... 이건 질문이 아니라 질문을 빙자한 야단치기였다. 그는 이번 공모전 결승에 올라온 아이디어들이 다 고만고만하다는 총평까지 했다. 응모작의 전체 수준까지 거론하는 건 분명 월권이요 오버였으나 나는 꿈 참고 들어야 했다. 이 프로젝트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의 입장과 이권이 걸렸기에 나 혼자 성질을 내 기회를 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공모전 모집 공문을 낼 당시 주최측이 예시로 들어준 아이디어 팁까지 거론하며 이런 아이디어를 낸 팀이 왜 없는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사실 대답은 뻔했다. '그 아이디어가 별로라서'라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역시 참아야 했다.

그 심사위원은 우리가 낸 아이디어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데서 그치고 있다고 야단을 치며 적어도 공적인 캠페인이라면 시민들에게 새로운 행동 강령을 제시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호통을 쳤다. 나는 그동안의 어떤 공공 캠페인이라도 시민들에게 새로운 행동 강령을 제시한 적이 있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친 채 바보처럼 우물거려야 했다. 순간적으로 눈물이 났다. 나는 명백한 약자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심사위원은 일순에 분위기를 장악했고 우리는 졸지에 형편없는 팀으로 전락했다. 이 정도면 우리가 낸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도 뒤늦게 손을 들어줄 심사위원이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무릇 커뮤니케이션이란 상호 간의 이해와 협력을 전제로 할 때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모든 분야가 수직적 인간관계로 움직이는 곳에서 광고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예상대로 우리 팀은 불합격이었다. 내가 프리젠테이션 중 모진 질문을 받는 걸 옆에서 지켜본 감독도 뒤늦게 심사위원의 행태에 대해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우리가 늘 잘한다고 생각했던 감독님 회사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되어 그나마 다행이라며 서로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신자본주의는 늘 폭력적이다. 매스컴에 보도되는 일상적인 '갑질' 말고도 힘센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을 상대로 벌이는 경제적·심리적 횡포는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심지어 광고주 중에는 말도 안 되는 주제를 제시하며 당장 광고로 만들어 달라는 경우도 왕왕 있다. 몇 년 전 구강제품을 생산하는 회사가 그랬다. 제품 광고 겸 기업 PR을 하는 캠페인 프로젝트를 공모했는데 PT의 주제는 '치과의사들이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을 연장시켰다'는 명제를 증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동안 이해관계가 겹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치과의사들과 화해를 시도하려는 마케팅 시도인 것 같았다. 다소 어이가 없는 주문이었으나 광고주가 원하고 있으니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치과의사들의 공적을 증명하는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서울대학교에 있는  치의예 박물관까지 가서 자료 조사를 했으나 뾰족한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프로덕션에게 아이디어를 맡긴 대행사 CD(Creative Director)도 '이건 억지춘향'이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어쨌든 경쟁 PT는 진행되었고 우리는 탈락했다. 그런데 나중에 온에어 된 작품을 보고는 나는 그야말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


당신의 치아를 돌봐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제 당신이 돌봐드릴 차례입니다 

어릴  당신처럼 

아픈 치아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 광고는 그냥 그 회사가 그전부터 해오던 기업 PR 메시지였다. 잘 만든 광고였고 심지어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그 어디에도  '치과의사들이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을 연장시켰다'는 화두는 들어 있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궁금해하고 있던 차에 제일기획에 다니는 친구로부터 PT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경쟁 PT에 참가한 제일기획 팀은 광고주가 준 과제가 기업 발전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광고로 형상화하기에도 어렵다고 판단하고는 과감하게 메시지를 바꾸어 버렸던 것이었다.  이건 마치 '더 빠른 말'을 원하는 소비자에게 자동차를 내놓은 헨리 포드만큼이나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더 좋은 답을 원한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는 진리의 체현이기도 했다. 나중에 내게 이 얘기를 전해 들은 아내는 "그것도 제일기획 정도나 되는 애들이 얘기하니까 광고주가 받아들였을 거야."라는 말을 남겼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유명한 스님이 했으니 멋있다고 하지 내가 했으면 싱거운 놈이라 했을 것 아닌가. 역시 꿩 잡는 게 매라고, 억울하면 유명해지거나 실력을 쌓는 수밖에 없다. 더 읽고 더 쓰자.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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