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의 『한나와 그 자매들』을 다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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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며칠 전 우디 앨런이 젊었을 때 했던 인터뷰들을 모아놓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그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고 "그래, 한 무리의 사람들 얘기를 하다가 다른 무리로 건너가고, 그러다 다시 처음 사람들에게로 돌아오는 스토리를 만들면 꽤 흥미롭겠어."라고 생각하고는『한나와 그 자매들』을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쓴 적이 있다. 어제 술을 마시고 일찍 잠이 들었다가 한밤중에 깨서 왓챠에 들어갔는데 HBO의 명작 드라마라 소문난 <체르노빌>을 이어서 보려고 하니 왠지 마음이 쓸쓸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영화를 한 편 봐야겠다 결심하고는 생각난 김에 우디 앨런의 영화를 찾아보았다. 마침 요즘 우리 집에 와서 지내고 있는 혜민 씨의 왓챠 아이디를 빌려놓았는데 거기 그 영화 『한나와 그 자매들』이 있었다.
추수감사절에 가족과 친구들이 모인 파티에서 처제 바바라 허쉬의 미소 짓는 얼굴을 바라보며 사랑스럽다 감탄하는 마이클 캐인의 한심한 모습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부드러운 재즈 선율과 겨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따뜻한 감성의 카메라 덕분인지 로브 라이너 감독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연상되기도 한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는 건 그의 수다스럽고 재치 있는 대사들을 음미한다는 얘기와 같다. 이 영화 역시 끊임없이 엇나가고 강박증으로 똘똘 뭉친 웃기는 대사들로 가득하다. 배우 출신인 한나 부모님들의 신랄한 대사("한나가 내 앤지 배우조합의 다른 놈 아이인지 어떻게 알겠어?" "애가 재능이 뛰어난 걸 보면 당신 아이는 아니겠죠.")를 들으며 낄낄대고 있는데 순자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같이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녀도 우디 앨런을 좋아하는 걸까.
영화에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정자에 문제가 있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우디 앨런 부부가 우디 친구의 정자를 기증받아 쌍둥이를 낳았는데 결국 그것 때문에 이혼을 하고 친구로 남는다든지, 자신의 처제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마이클 케인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처제였던 여자와 재혼을 하는 사람은 우디 앨런이라든지. 건강 염려증에 걸린 우디 앨런이 뇌종양에 걸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시달리다가 신에게 협상을 시도하는 장면(오, 신이시여. 귀나 눈 정도로 하자구요. 뇌는 말고)은 우디 앨런스럽다.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야 『브로드웨이를 쏴라』에 갱스터의 애인이자 여배우로 출연했던 다이앤 스위트가 안나의 동생 홀리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매 순간 앵앵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고 흐뭇한 마음이 들었을 때는 벌써 새벽이었다. 새벽이라면 고양이 순자가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순자 : 우디 앨런은 셰익스피어 최고작을 『오셀로』라고 생각하고 있군.
성준 : 그거야 한나가 오셀로에 캐스팅된 걸 축하하느라 엄마가 그냥 해 본 소리지.
순자 : 암튼 우디는 셰익스피어를 좋아해. 마이클 케인이 정신과 의사와 상담할 때도 햄릿을 인용하잖아.
성준: 그랬어?
순자 : 뭘 본 거야? "결정을 못 내리겠어요. 숙부를 죽이지 못하는 햄릿처럼요."라고 하잖아.
성준 : 그래, 너 잘났다.
순자 : 우디 앨런이 방송국 여자 동료한테 자살할 뻔한 얘기 하는 대사는 진짜 웃겼어.
성준 : "종양이 있다고 하면 자살하려고 총을 샀어.
부모님이 걱정을 하실 테니 일단 부모님을 먼저 쏘고
그다음엔 삼촌.... 집안이 피바다가 되겠지."라고 한 부분?
순자 : 맞아, 맞아. 낄낄. 진짜 우디는.
성준 : 우디가 병이 없다는 걸 알고 기뻐서 천주교로 개종할 때 얘기도 재밌지?
순자 : 신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악과 나치는 도대체 왜 존재했냐고 묻는 우디의 질문에
엄마가 아빠더러 "당신이 대답 좀 해줘."라고 하니까
아빠가 "내가 무슨 수로? 나는 깡통 따개 원리도 모르는데?"라고 하는 대사.
순자 : 미키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언급하며 "그럼 그 아이스 쇼를 또 봐야 돼?"라고
투덜대는 것도 너무 귀여웠어.
성준 : 그 직전에 소크라테스 얘기하며 "그리스 꼬맹이들만 상대한 사람에게
뭐 배울 게 있겠어?"라고 하는 장면은 또 어떻고.
순자: 역시 인문학적 성찰이 있으면 유머가 고급스러워져.
그러니까 너도 책을 좀 읽어.
.
성준 : 영화의 시작과 끝이 모두 추수감사절 파티인 것도 나는 참 좋더라. 따뜻해.
순자 : 『스타워즈』의 리아 공주 캐리 피셔가 홀리의 친구로 나오는 것도 백미지.
순자 : 이 영화, 우디 앨런이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쓴 시나리오라며?
성준 : 너 내 페북 자주 보는구나?
순자 : 아냐. 원래 알고 있었어.
성준 : 뻥치시네.
순자 :......
어느덧 순자가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끝났다. 순자는 매일 새벽 몇 분 동안만 말을 할 수 있는 고양이다. 원래는 말을 못 했는데 아내가 실수로 사료의 양을 줄이는 바람에 너무 배가 고파 '고뇌하는 고양이'로 변했을 때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내친김에 인간의 말까지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말을 할 줄 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만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일들이 생길 게 뻔하므로 제일 만만한 나에게만 오픈을 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순자와 말을 트게 된 행운도 회사를 그만두고 새벽에 일어나 혼자 놀 수 있게 된 덕분이다. 이래저래 회사를 안 다닌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나저나 순자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잇몸이 안 좋은 걸 방치했다가 결국 이를 거의 다 뽑았고 심장도 약하다는 진단을 받았으니 말이다. 이번에 병원비로 많은 돈을 썼고 앞으로도 매년 엄청난 진료비를 쓸 예정이지만 그래도 난 그녀가 안 아프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렇게 같이 영화에 대한 얘기도 나눌 것 아닌가. 비록 엄청나게 건방지고 믿을 수 없게 허세가 심한 고양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