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용은 다 잊어도 그 장면은 기억나는 이유

How 2 write : 글쓰기 방법론

by 편성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건

세찬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었다


독자의 마음을 여는 건

완벽한 이론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이듯이


1

영화 《리틀 빅 히어로》에서 '올해의 기자'로 선정된 지나 데이비스는 프레스센터 연단에 올라 수상 연설을 시작하며 난데없이 양파를 하나 꺼내서 까기 시작한다.

"기자라는 직업은 사건을 좇아가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겹겹이 싸인 레이어를 하나하나 벗겨내는 거죠." 벗겨낸 양파 껍질의 매운 냄새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 "까고 또 까다 보면 진실은 밝혀질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죠. 어떤 경우라도 제게 남는 건 눈물뿐이지만."

그녀의 수상 소감이 끝나자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며 활짝 웃는다. 이 영화는 지나 데이비스 말고도 더스틴 호프만, 앤디 가르시아 등 쟁쟁한 스타가 출연한 작품이었지만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이 장면만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양파를 사용한 메타포가 그녀가 얘기하려던 상황과 너무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2

"거위와 사랑에 빠진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다 그렇듯 둘은 언제나 함께 붙어 다녔죠. 청년은 거위와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싶어서 꾀를 냈습니다. 바지 안에 거위를 넣고 들어가서 영화를 볼 때 바지 지퍼를 열고 거위의 목만 꺼내 놓는 방법을 쓰기로 한 거죠. 둘이 한참 신나게 영화를 보고 있는데 옆에 앉은 할머니가 놀라 할아버지에게 속삭였습니다. "여보, 내 옆에 앉은 청년이 바지 지퍼를 열고 그걸 꺼냈어." 할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미친놈... 신경 쓰지 마." 할머니는 할아버지 말대로 청년 쪽을 외면하고 영화만 봤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다시 할아버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저 청년이..." "아, 글쎄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라니까." "나도 그러려고 했어. 그런데 저 청년의 물건이 자꾸 내 팝콘을 먹어서."

이 에피소드는 《깊은 밤 깊은 곳에》,《천사의 분노》, 《신들의 풍차》등 수십 편의 소설과 영화 TV 드라마 시나리오를 썼던 베스트셀러 작가 시드니 셀던의 데뷔작 《벌거벗은 얼굴(The Naked Face)》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 중 하나가 극장식 콘서트홀에서 스탠딩 개그를 할 때 했던, 그저 스쳐가는 내용이었는데 다른 건 다 잊어도 이 장면 만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은 걸 보면 꽤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3

최근에 찾아본 영화 《월드 워 Z》에서 전직 UN 요원 브래드 피트를 따라 전염병의 비밀을 찾아 나선 하버드의 젊은 생체 과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대자연은 연쇄살인범과 비슷합니다. 매우 똑똑하고 철두철미하지만 그들에겐 의외로 경찰에 잡히고 싶은 심리도 있죠.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 대자연의 약점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과학자는 영화 초반에 어이없는 오발 사고로 일찍 죽어버리지만 나는 대자연을 연쇄살인범에 비유하던 과학자의 이 대사가 정말 좋아서 얼른 노트에 메모를 해놓았다.


4

영화든 소설이든 전체 내용은 다 잊었는데도 유독 한 장면이나 대사가 잊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나는 어쩌면 이거야말로 '컬러 콘텐츠'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로버트 맥기 같은 시나리오 닥터들은 아마도 이런 인상 깊은 장면의 예를 수십 편씩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양선규 교수가 쓴 『글쓰기 인문학 10강』이라는 책의 첫 장에서 '설명 잘하는 사람이 글 잘 쓰는 사람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무릎을 쳤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결국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고 막연한 것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이해시켜 주는 것 아닐까. 그러려면 무엇보다 예를 잘 들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예수나 부처, 공자 같은 현인들은 하나같이 메타포의 선수들이었다. 글쓰기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할수록 아름다운 글보다 중요한 건 스토리텔링이라는 생각이 든다.


5

《브리짓 존슨의 일기》,《하우스 오브 카드》 등을 쓴 시나리오 작가 앤드류 데이비스는 말한다. "나는 어떻게 해서 시나리오 작법의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었을까? 내가 택했던 방법은 매일매일 글을 쓰는 것이었다. 당신이 아무리 수많은 책을 읽었다고 해도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길은 이 방법뿐이다." 매일매일 쓰는 것. 뻔히 알면서도 가장 실천하기 힘든 건 이것이다. 오늘도 쓴다. 내일도 쓴다. 어제는...... 아, 어제는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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