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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Oct 27. 2021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들에게 바치는 송가

JTBC 드라마 《인간 실격》리뷰

정 많은 부자로 살라고 이름을 '부정'이라 지었지만 이름대로 되진 못했다. 어쩌면 부정이라는 이름 때문에 인생이 부정적으로 풀린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그녀의 삶은 제대로 되는 게 없고 이어지는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문제적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오래전 소설 제목을 그대로 차용한 JTBC 드라마 《인간 실격》은 극본을 쓴 작가가 밝힌 제작 의도에도 나와 있듯이 '뭔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 출판사에 들어갔던 주인공 이부정은 대필작가가 되어 탤런트 아란의 책을 대신 쓰지만 결국 작품도 빼앗기고 출판사에서 쫓겨나 악플을 달다가 경찰에 고소까지 당한다. 연하의 남편과 결혼했는데 애정은 오래전에 식은 상태이고 마마보이인 남편은 학창 시절의 애인과 바람을 피운 경력이 있는 주제에 마음은 약해서 미워하기도 힘들다. 결국 그녀는 남편이나 시어미에게 퇴직 소식을 알리지 못하고 가사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단한 나날을 견디고 있다. 호스트바 출신의 강재는 '완벽 대행 서비스' 같은 요상한 명함을 들고 다니며 뭔가 떳떳지 못한 일을 하고 지내는 편인데 의외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일 때가 많다. 한없이 쓸쓸하고 우울한 드라마 '인간 실격'은 이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치면서 시작된다.


내가 농담 삼아 "너무 기분이 좋아서 좀 억누를 필요가 있을 때 보면 딱 좋은 드라마야."라고 할 정도로 이야기는 시종일관 어둡고 심란하다. 그런데 이 도저한 일관성이 묘하게 위로를 준다. 아내는 지켜보고 있자면 슬프고 우울한데도 악착같이 싸우는 장면이 없어서 이 드라마가 좋다고 했다. 물론 아란과 부정은 댓글로도 싸우고 미행을 붙여 행적을 쫓기도 하지만 이내 제풀에 지쳐버린다. 불행이 원인이 상대방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절대 고독'에서 온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알아 버렸기 때문이리라. 심란하고 불쌍한 건 부정과 강재만이 아니다. 부정의 아버지 박인환은 오피스텔에 혼자 살면서 종이박스를 주우러 다니는데 요즘은 치매 초기 증상 때문에 출입문 비밀번호가 생각 안 나 몇 시간씩 문 앞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부정이 써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아란은 바람과 폭력으로 얼룩진 삶을 사는 남편과 방송에 나가 잉꼬부부 행세를 하는 것에 지쳐 방송이 끝나면 호스트바에 가서 소리를 지르며 운다. 강재의 친구 유순우는 '딱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착한 청년인데 걸그룹 지망생이었다가 포기하고 지금은 영향력 없는 먹방 유튜버를 하며 PC방에서 지내는 미녀 손나은을 좋아한다. 하지만 딱히 희망을 가질 만한 게 없는 청춘들이라 그런지 둘의 사이는 겉돌기만 한다. 딱이의 누나 조은지는 부정의 시어미 건물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약사인데 어렸을 때부터 친하던 친구 양동근과 함께 살면서도 애인 사이는 아니다. 요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이혼남  양동근도 조은지가 좋긴 한데 감정이 어정쩡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안해만 하는 삶이다.


5년 만에 하는 드라마라 이번엔 좀 밝은 걸 하고 싶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그런 게 나타나질 않아 결국 대본을 읽고 울어버린 이 드라마에 출연을 하게 되었다는 전도연은 과연 다른 배우라면 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부정 역할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본연의 아우라가 남아 있는 다른 연기자들에 비해 전도연은 무슨 역을 하든 자신을 완벽하게 지우고 백지상태에서 다시 캐릭터를 만들어 나간다. 류준열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연기력과 카리스마를 인정하지 않기가 힘들다. '전도연이 나온다는데 뭘 망설여?'라는 마음으로 흔쾌히 출연을 결심했다는 그는 그야말로 인생 캐릭터를 만나 열연을 한다. 이부정의 남편 정수 역할을 맡은 박병은의 연기도 놀랍다. 유약하고 마마보이면서도 사려 깊은, 복잡 미묘한 캐릭터를 감탄할 만하게 보여준다. 하긴 이 드라마는 이 사람들 말고도 박인환, 신신애, 김효진에 이르기까지 연기 못하는 인물이 하나도 없다(아란 역은 탤런트 박지영이 맡았다). 어쩌면 그 이유는 영화를 주로 만들던 허진호가 감독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이후 그의 영화들은 좀 별로였지만 함께 《천문》을 만들고 이번 드라마도 함께 한 공동연출 박홍수가 극의 흐름을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보고 싶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적이 있다. 불세출의 서예가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관료이기도 했던 추사 김정희가 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로 귀양을 떠났던, 가장 춥고 어두운 시절에 그렸던 세한도는 한없이 쓸쓸하고 앙상한 소나무가  그루  을 뿐이다. 그런데도 후세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  이유는 무엇일까.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힘든 시절의 이야기와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역사와 지역을 초월한다는 증거 아닐까. 극적 사건도 없고 시종일관 어두웠던 탓에 시청률도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블록버스터보다는 매니악한 드라마를 좋아하는 쪽이라면  추천하고 싶은 웰메이드 드라마다. 어느 햇살 맑은 날을 골라 정주행 하시기 바란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타고 진부한 슬픔들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게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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