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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Oct 28. 2021

구자혜라는 신대륙

연극 《로드 킬 인 더 시어터》리뷰

'백상예술대상'에서 구자혜라는 연출가가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라는 작품으로 연극상을 타는 것을 TV로 지켜본 아내와 나는 우리가 그동안 너무 대학로의 몇몇 연극만 보고 지낸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 연극은 우리 동네에 있는 '성북문화재단'과 협업한 작품이었는데 우리는 전혀 몰랐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아내는 반성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국립극단에 10만 원짜리 유료회원 가입을 하는 결단을 내렸다. 회원에 가입하면 국립극단에서 상연하는 작품의 좌석이 우선적으로 오픈되고 할인된 가격으로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특권도 주어진다. 그런 사연으로 어제 《로드킬 인 더 시어터》를 명동예술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동물의  '대상화'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고라니, 개, 비둘기 등 동물의 시각을 빌려 이야기를 펼치는데 특히 동물의 죽음에서 인간의 연민 어린 시각을 제거하고 그들이 겪는 고통 그 자체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렇게만 얘기하면 연극의 감흥을 30%도 전하지 못하는 게 되고 만다(흡사 음악 얘기는 하지도 못하고 가사 내용에만 집착하던 예전 가요평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연극의 묘미는 내용을 압도하는 형식에 있다. 육중한 검은색 의상을 입은 배우들은 등장하자마자 비상구의 위치와 무대의 생김새는 물론 가장 큰 소리의 크기와 시각 효과까지 예를 들어 설명해 준다(이것을 '개방형 음성해설'이라 부른다는 것은 나중에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고 알았다). 배우들의 대사는 무대 중앙 상단에 위치한 전광판에 자막으로 표시되고 무대 좌우로 수화 통역사 두 명이 등장해  대사를 전달한다. 이른바 '배리어 프리(무장애) 공연'이다.


구자혜 연극은 바로  부분에서 차별점을 갖는다.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의 대사가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표시되는데  타이밍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심지어 배우가 어느 문장을 길게 빼면 자막도 흔들거리며 춤을 추는 느낌으로 처리된다. 어느 연극이나 배우들이 대사를 완벽하게 외워야 하는  당연한 일이지만 프롬프터를 보지 않고도 이렇게  러닝타임 동안 (광고계나 음악계에서 많이 쓰이는 은어로)  '기깍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경우를 목격하는 것은 거의 쾌감에 가까웠다. 특히 1부에 소련 우주선에 탔던 떠돌이  라이카 역할을 했던 성수연 같은 경우엔 배우가 너무 혹사를 당하는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포효와 동작을 선보였다. 고애리 문예주 이상홍 이리 박소연 전박찬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가 눈부시고 장애 배우인 백우람의 완벽한 대사와 몸짓 또한 감동적이었다.


그렇다고 대본이 재미없는 것도 아니다. 이 연극의 대사는 사람과 동물이 번갈아 구사하는 것이라 대부분 분절된 형태로 제시되는데 특히 호텔에 가서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면서 오션뷰, 마운틴뷰, 하버뷰, 시티뷰, 하버 오션뷰, 파노라마 하버 오션뷰... 등등을 나열하는 장면은 집요해서 너무 웃겼고 '미안해'를 연발하는 비둘기들의 긴 헛소리들도 부조리극스러운 재미를 주었다.  인터미션까지 포함해 3시간이 넘는 연극이 모두 끝나자 아내는 너무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며 즐거워했다. 나는 이렇게 대사와 자막을 일치시키는 게 처음엔 놀랍지만 반복되면 그 충격은 완화될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더니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자혜는 괴물임에 틀림없다. 못 보던 신대륙이 나타난 느낌이었다. 11월 14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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