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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21. 2021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에 대한 차가운 대답

연상호의 《지옥》리뷰

어느날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너는 모년 모일 몇 시에 지옥으로 간다."라고 고지를 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김동식 작가가 쓴 초단편소설에 등장할 만한 이런 황당한 설정이 지금 넷플릭스 차트를 달구고 있다. 연상호 감독은 최규석 작가와 함께 공동으로 총 57화의 원작 웹툰을 연재한 것으로 보아 드라마로의 확장은 시작할 때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모든 일엔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아니,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행동양식을 정할  있으니까.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닥친 불행이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고 더구나 무작위로 정해진다고 하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과연 신이나 운명은 존재한다고   있는가.  드라마는 삶에 나타나는 불행을 '지옥행 고지받기' 형상화해 보자, 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연상호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그중에서도 특히 개신교)들이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거나 죄인이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묘사해야 하는 이유를 추적한다. 중요한  비난하는  아니라 냉정하게 추적해 본다는 점이다.  처음 지옥행 고지를 받은 정진수(유아인)  현상을 종교적으로  포장해 '신의 메시지' 둔갑시키든 고지받은 사람들이 이용당하지 않도록 돕는 변호사 민혜진(김현주)  차가운 실존주의를 바꾸진 못한다. 인간은 언제나 불행의 행동력에 뒤지고 만다.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수천  동안 종교와 사회적 룰들을 만들어 왔고  결과에 따라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었을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설정을 타당성 있는 현실로 만든 건 감독의 통찰력 위에 믿음직한 연기자들의 호연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김현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OCN의 《왓쳐》를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표정이나 목소리는 물론 액션까지 최상의 연기를 보여준다. 김현주뿐이 아니다. 정진수 역을 맡은 유아인, 진경훈 형사 역의 양익준, 배영재 PD 역의 박정민, 그리고 이레, 김도윤, 김신록, 류경수 등 이번에 처음 이름을 안 배우들까지 모두 저마다의 역할에 딱 맞는다. 그리고 이런 배우들을 다룰 때 스타라고 미련을 두거나 봐주지 않는 감독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불행은 가차 없고 이유도 없다'는 세계관에 맞게 배우들도 맡은 역할을 다 하고 나면 사라진다.


스포일을 할 생각은 없다. 다만 마지막 박정민과 원진아의 선택은 감동스러웠고 김현주가 탄 택시의 운전사 때문에 일순 마음이 놓였으며 다시 등장하는 누군가는 시즌2에 대한 기대를 품게 했다는 것 정도는 말하고 싶다. 《오징어 게임》이 '사는 건 어린애들 놀이와 별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줬다면 《지옥》은 '세상 일은 신의 뜻과는 상관없다'는 걸 보여준다. 한국의 스토리텔링이 날로 힘을 내고 있다. 성북동 주민이 출연하는 드라마라 보게 되었는데 6회까지 다 보고 나니 스토리나 컨셉은 물론 연기, 미술까지 고르게 좋은 작품을 보았다는 만족감이 밀려왔다. 《지옥》이 넷플릭스에 공개되기 이틀 전 우리집에 와서 와인을 마시며 논 양익준 감독은 자신의 딸로 나온 배우 이레가 '연기는 물론 인격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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