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의 『울분』
나는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를 읽으며 인간의 속성을 이렇게 신랄하게 그리면서도 확장성이 뛰어나 시대와 국경의 경계를 가볍게 지워버리는 소설이 다 있나 감탄한 적이 있다. 이번에 읽은 『울분』은 스무 살의 젊은이 이야기를 이렇게 재밌고 슬프게 그릴 수 있을까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에로틱해서 좋았다. 이 소설은 대학에 들어가 처음 좋아한 여자애가 차에서 오럴 섹스를 해주는 바람에 놀랐던 청년의 이야기다. 특히 충수염으로 입원한 마커스에게 찾아간 올리비아가 손을 대자마자 허공 높이 사정해 버리자 "허공에 화살을 쏘았다네. 화살은 어딘지 모를 땅으로 떨어졌다네."라는 롱펠로의 시를 읊는 장면은 진짜 짓궂고도 야하다.
물론 필립 로스는 에로 작가가 아니고 야한 소설만 쓰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목가』에서 무두질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가죽 무역 이야기, 그리고 장갑 사업의 역사를 거쳐 재단•재봉 작업에 대한 아주 세세한 공정과 일화까지 장장 18페이지에 걸쳐 설명하던 주인공 스위드처럼 이 소설에서도 1950년대 뉴어크에 있는 정육점에서 닭을 손질하고 진열하는 아버지와 그 손님들에 대한 묘사("그런 여자들이 닭 한 마리 사 가면서 우리에게 뭔 짓을 시키는지 넌 잘 모를 거다.")는 작가가 예전에 정육점을 실제로 운영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이다.
예전에 김수현이 극본을 쓴 특별드라마(제목은 잊었다. 원미경의 남편이 송승환이었다)에서 병원에 입원한 원미경의 시아버지가 "너, 도스토예프스키 읽었냐? 나는 세상에 그 사람보다 소설 잘 쓰는 사람은 아직 보질 못했다."라고 하는 대사가 있었다. 그땐 어렸고 또 소설도 많이 읽지 못했기에 불가능했지만 이제 그 노인을 다시 만난다면 나는 이렇게 얘기할 거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필립 로스는 꼭 읽으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리고 되게 야해요.(사실 저도 계속 미루고 있다가 겨울서점의 김겨울이 왕추천하는 바람에 사서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