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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27. 2021

원작 소설로 영화를 만들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누가 '원작 소설보다 더 뛰어난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의 예를 들어 보라'라고 하면 나는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과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꼽아왔다. 이제 거기에 한 작품을 더해야 할 것 같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봤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단편소설을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을 보는 세 시간(정확히는 2시가 59분) 내내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개작을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하루키의 원작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이야기의 기본 얼개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이리저리 다른 스토리를 붙여 새롭게 창조해 낸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가후쿠가 처음 침대에서 아내와 주고받는 긴 대사들도 멋지고(원작에서는 오토라는 아내의 이름조차 없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를 무대에 올리기까지 -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녹음한 대사를 카세트 테이프로 반복해서 듣는 습관부터 연극을 위한 오디션 에피소드와 일본 한국 대만을 아우르는 배우들의 사연, 그리고 '배리어 프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진행되는 연습 장면들까지 - 의 긴 과정은  아주 사려 깊고 성숙한 자세를 유지한다. 심지어 스물세 살의 젊은 운전기사인 미사키가 운전을 잘하게 된 이유(술집을 운영하던 엄마가 어린 딸에게 운전을 시켰는데 운행이 미숙할 때마다 차에서 내려 딸을 때렸기 때문) 대목에서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실감했다. 혹시나 해서 원작 소설에서 이 부분을 찾아보니 영화와 달리 미사키의 엄마는 술에 취해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고 즉사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어떤 여자가 남편을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다른 남자들과 잔다'라는 소재를 생각해내면  하루키 같은 소설을 쓸 수도 있지만 하루키보다 늦게 시작한 류스케 감독은 그걸 가지고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나는 특히 배우 출신 극작가 오토와 잤던 젊은 배우  다카츠키가 가후쿠에게 '전생이 칠성장어였던 여자 이야기'의 후반부를 들려주는 장면은 놀라웠다. 죽은 오토가 생전에 만들어낸 이 이야기는 가후쿠는 미처 듣지 못한 버전임과 동시에 섹스 중이 아니면 절대 듣지 못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두 사람과 관객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오동진 기자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통해 알게 되었다. 오 기자는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 소설이 실린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다시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자체로도 훌륭한 단편이지만 다소 심플했던 그 소설이 어떻게 이런 기나 긴 이야기로 재탄생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순수한 궁금증 때문일 텐데, 결국 그는 이 영화에 「드라이브 마이 카」말고도  책에 함께 실린 「기노」와 「셰에라자드」까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동진 기자의 언급 때문에 나도 영화를 본 후 집에 있는 하루키의 단편집을 다시 들춰 보았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다 가후쿠에게 목격된 이야기는 「기노」라는 단편에 모습을 들킬 때 체위까지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고, 칠성장어에 대한 이야기는 「셰에라자드」에 언급되어 있었다. 셰에라자드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감독이 "전생에 칠성장어였던 게 기억난다"던 여자의 이야기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두기보다는 섹스를 하면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오토의 습성을 보다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차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장의 아우라에 눌리지 않고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를 가지고 놀 수 있었기에 깐느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을 거야, 하면서.


인스타그램으로   영화에 대한 리뷰를 찾아보니 가후쿠와 미사키  사람이 자동차 지붕을 오픈하고 담배를 내밀고 있는 장면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나이와 처지를 떠나 서로의 상처를 이해한  깊이 연대하는 모습에서 오는 공감의 흐뭇함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마지막에 미사키가 기후쿠의 차를 몰고 한국 도로를 달리는 장면이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면서 문득 크리스마스인 12 25 아침 아홉  삼십 분에  영화를 보기 위해  장소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어떤 계기로 왔든 좋은 이야기를 만난 덕분에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가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적어도 아내와 나는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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