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 까칠교수님의 글쓰기 수업』
아리랑도서관 글쓰기책을 모아 놓은 서가에서 발견한 책이다. 하버드대 최연소 지도교수가 된 저자가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쓴 책인데 일단 '까칠교수님'이라는 경박한 워딩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책 제목에서 하버드대학을 팔아먹는 것도 너무 통속적인 데다 몇 장 넘겼는데 '갈굼'이나 '다구리' 같은 비속어를 쓰는 번역도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사람의 핵심입니다."라는 명제와 함께 O. J 심프슨이 무죄를 받게 된 이유는 '배심원들이 검사의 말보다 변호사의 말을 선호했기 때문'이라는 그의 설명에 나는 매료되고 말았다. 이어지는 '최고의 이야기를 하는 정치가가 이긴다'는 그의 말에 신뢰를 느낀 것이다. 로저 로젠블랫 교수는 각계각층에서 모인 열두 명의 학생들을 앉혀 놓고 글쓰기를 하는 게 어떻게 인생을 바꾸어주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폴란드의 게토 마지막 날 유태인들이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써서 금이 간 벽 틈에 종이조각을 돌돌 말아 숨겨놓은 얘기는 너무 짠하다. 졸지에 사지가 마비된 장 도미니크 보비에는 왼쪽 눈꺼풀만 껌뻑이는 방법으로 알파벳 신호를 보내 『잠수종과 나비』를 썼다. 글을 쓰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모비딕』의 이슈마엘 같은 존재인 것이다.
로젠블랫은 같은 단어를 피하라거나 되도록 단문을 쓰라는 말도 일종의 미신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잘 읽히고 의도가 잘 전달되는 글을 쓰는 것이 먼저일 뿐 이런 규칙들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는 또한 좋은 독자가 좋은 작가가 된다는 점을 구체척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가 떠올리는 수많은 작품과 작가 리스트를 따라 읽어 내려가다가 내가 좋아하던 작가 앤 타일러나 J.D 샐린저의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콕 집어 설명할 땐 탄성을 질렀고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의 존 하우스먼 교수를 따라 해 보다가 실패했다는 얘기할 때는 원작 소설만큼 뛰어났던 영화를 추억했다. 각주를 보니 그 영화가 무려 1970년 작이다((나는 고등학교 때 TV 명화극장에서 봤다. 그거 다 보고 다음날 한문시험 100점 맞았던 기억이 또렷하다). 티모시 보텀스와 린지 와그너가 하트와 킹스필드 교수 딸 역할을 했는데 티모시 보텀스는 《새벽의 7인》에, 린지 와그너는 TV 드라마 《소머즈》의 주인공으로 나오던 배우였다.
"최고의 작가를 보면 모든 것이 너무 쉬워 보여요."라는 학생의 푸념에 그는 “글쓰기에 있어서 진정한 쉬움은 우연이 아니라 기술에서 비롯된다. 춤을 배운 이들이 가장 쉽게 움직이듯이.”라는 알렉산더 포프의 말을 들려준다. 내가 평소 생각하던 글쓰기를 한 줄로 요약해 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교실에 모인 학생들에게 독설을 퍼부으면서도 글을 쓸 수 있도록 격려한다. 그 방법은 그들이 서로의 독자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글쓰기 교실에 온 이상 세상의 다른 독자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이 교실의 독자만 의식하며 글을 쓰면 되는 것이다. 이는 아내와 내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소행성 글쓰기 워크숍'의 모습과 똑같다. 워크숍에 온 사람들은 처음엔 자신이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몰라 방황하지만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고 기획과 라이팅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신기하게도 글쓰기를 하면 인생이 바뀐다. 그것도 언제나 좋은 쪽으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 중 <진흙>이라는 작품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러셀 뱅크스의 『달콤한 내세』라는 책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소리와 분노'라는 책 제목이 『맥베스』 5막 5장에 나왔다는 것도 이 책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것이다.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선입견을 이겨내고 읽었더니 의외로 좋은 책이었던 것이다. 2011년에 초판을 찍은 책인데 아마 도서관에나 가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5분의 1 정도 분량이 남았다. 로젠블랫 교수와 학생들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물론 읽는 것이지만) 뜻하지 않게 시간이 남아 남의 수업을 참관하는 것처럼 여유롭고 흐뭇하다. 천천히 마저 다 읽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