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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an 22. 2022

엔진이 튼튼한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기분

설재인 소설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

해야  일이 많아서 마음이 급하지만  와중에 너무 비슷한 책들만 살피고 고민하는  같아서 어제는 큰맘 먹고 소설책을   읽기로 했다. 가져온  중에서 가장 스토리텔링이 강할  같은 설재인의 작품을 골랐다.


이 소설은 서른세 살 먹은 딸이 엄마랑 등산 갔다가 내려와 막걸리 한 잔 하고 여자화장실에 들어가 우연히 '평행우주'로 빠져 들어가는 얘기다. 주인공이 간 곳에도 똑같은 엄마 아빠가 있지만 자신인 딸은 사라지고 이름이 똑같은 아들이 하나 있다. '패럴렐 월드'에서 주인공의 성별만 바뀐 것이다. 이렇게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끝까지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건 설재인이라는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과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성찰, 그리고 유머 덕분이다.

게다가 모든 게 구체적이라 좋다. 사이가 틀어졌던 베스트 프렌드에게 자신의 정체를 설명할 땐 외국 가수 아론 카터 얘기를 꺼내고 햄버거집 아르바이트를 거론할 때도 그냥 햄버거집이라 하지 않고 '맘스터치 알바'라고 브랜드를 정확히 지칭한다. 친해진 경찰과 막걸리를 마실 때 "송명섭으로 드라이하게 한 병씩 마시고 그다음에 금정산성으로 넘어가도 되죠?" 같은 문장은 정말 그렇게 마셔본 사람으로서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 이 소설가는 '공감'이 뭔지 안다.  엔진이 튼튼한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당황해서 누렇게 뜬 남자애의 얼굴을 '지지난 계절에 제사 지내려고 둥그렇게 윗부분의 껍질을 깎아놓고는 잊은 채 냉장고에 방치한 사과 같았다'라고 묘사하거나 인생의 위기를 맞은 옛날 절친이 "나는 가끔 인생이 테트리스 같다는 생각을 해. 너무 많이 잘못 쌓인 블록들이 있을 때 긴 블록 하나가 내려오면 갑자기 앞날이 뻥 뚫리잖아."라고 하는 등의 절묘한 표현력이다. 시도 때도 없이 거침없이 내뱉는 여자들의 찰진 욕도 매력 포인트다.

영화 시나리오처럼 시퀀스만 건조하게 나열하는 SF소설들이 많은데 이런 작품은 그들과 잠깐만 비교해 봐도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따뜻하고 소박한 결말이다. 지난해 진주문고에 북토크 하러 갔을 때 이병진 팀장이 추천해서 이 소설가를 알게 되었다. 설재인은 서울대 수학과를 나와 자사고에서 수학선생을 하다가 아이들의 눈망울 쳐다보는 게 괴로워서 학교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나 독자들을 위해서나 참 잘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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