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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Feb 10. 2022

카피라이터로 살 때와 작가로 살 때의 다른 점

문득 써보는 손바닥 자서전

어렸을 때부터 교과 공부하는 것보다는 책을 읽거나 글 쓰는 걸 좋아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 마루에서 뒹굴며 이병주의 『행복어 사전』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셨다. 대학 진학할 때 "안 된다. 국문과 가면 굶어 죽는다."라고 했던 담임선생님의 말을 거역하지 못해 영문과에 들어갔다. 담임은 서울대 국문과 출신이었다.

대학에 가서는 노래하고 만드는 동아리에 들어가 베짱이처럼 기타 치고 노래하면서 살았다. 역시 학과 공부보다는 '쓸데없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게 좋았다. 4학년 때도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며 영문과 친구들은 "성준이가 부럽다."라며 야유를 날렸다. 그러나 그때는 콤플렉스가 심하고 자신감과 상상력은 쭈그러져 있어서 뭘 해볼 생각을 못했다. 명색이 노래 서클을 다니면서도 가사 한 줄을 못 쓰고 살았다. 스물두 살 아침에 배달된 신문에 '오늘의 작가상'을 탄 스물네 살의 구광본 시인을 보며 "저 사람은 나보다 두 살 많네."라고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군대를 다녀오고 졸업을 하고 광고회사에 들어가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평소에 카피라이터 하면 잘하겠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 대학 동아리 선배 중 광고계나 영화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다. 서울광고 아카데미라는 카피 학원도 다니고 여러 공모전에 도전해 상도 받는 등 나름 노력을 해서 들어간 광고계였다. 일복은 많고 성과는 적었다. 비교적 한가하다고 소문난 광고대행사에 가더라도 하필 내가 간 팀은 늘 바빠서 야근을 해야 했고, 성격 상 밤에 집중을 잘 못하는 나는 새벽에 따로 나와 아이데이션을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IMF 때 회사 선배 두 명이 천 만원씩 보증을 세운 뒤 도망을 쳤다. 한 명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배였는데도 그랬다. 낭비벽이 심했던 그는 인천에 있는 여관에서 '조바'를 하며 숨어 지냈다고 했고 몇 년 후 다 시 나타나 보증을 서 준 사람들에게 "한 달에 십만 원씩이라도 갚겠다"며 눈물을 보였으나 그가 평생 내게 갚은 돈은 그 십만 원이 전부였다. 또 한 사람은 아예 사라져 그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둘 다 고기를 좋아했다. 아마 어디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늘 허덕이는 삶이었다. 광고계는 언제나 비상사태였고 다니는 회사는 평일 휴일 국경일 가리지 않고 일이 많았다. 한 번은 같이 일하던 AE로부터 광고주 회장님이 "야, 광고대행사 애들을 왜 재워?"라고 하셨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사람이 할 소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는 잔인했다. 업계 특성상 내부든 외부든 모두 경쟁이 기본이었는데 나는 끈기와 집념이 부족해 칭찬을 들을 때가 적었고 어쩌다 이겨도 제 밥그릇을 찾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내부 경쟁보다 괴로운 건 어떤 기획이나 아이디어라도 광고주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진리가 되고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현실이었다. 광고 프로덕션으로 이직한 후로는 레퍼런스 동영상이 없으면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시안을 만들지도 못하는 풍토가 황당했다. CD(Creative Director)나 광고주 입맛을 버려놓은 업계의 자업자득이었다. 나는 광고계를 떠날 마음을 먹었다.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놀았다. 마침 아내도 회사를 그만두고 노는 시기였다. 우리는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걱정거리를 각자의 머리에 얹은 채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냈다. 제목이 왜 그 모양이냐는 소리도 들려왔으나 생각보다 책이 잘 팔렸고 리뷰도 좋았다. 아내가 큰 출판사 계약을 해지하고 마케팅 회사와 협업을 하는 일인 출판사로 선회를 한 게 적중했다. 무엇보다 출판사 대표님이 내 글을 좋아했다. 정성을 다해 책을 만들었고 전력을 다해 팔았다.

출판기념회를   전국의 서점을 다니며 북토크를 했다. 때마침 터진 코로나 19 때문에 북토크 일정이 많이 취소되었지만 그래도 나를 원하는 곳은  있었다. 줌이나 유튜브를 통한  강연도 했다. 북토그 이후 글쓰기 강연 제의가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내가  글은 유머와 위트가 있어서  읽힌다는 평이었고  강의는 학인들이  글을 정성껏 리뷰해 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참여연대 느티나무에서 6 글쓰기 강연을 하고  후기를 읽고 강남에서 논술학원을 하는 원장님이 연락을 해오셨다. 자기 학원에서 글쓰기 강의를 해달라는 제의였다. '편성준의 유머와 위트 있는 글쓰기'라는 강의 제목은 그렇게 탄생했다.


유튜브 인터뷰도 하고 케이블 방송에도 나갔다.  과정에서 서울시민대학에서 강사를 모집한다는  알게 되었다. 제출 서류가 까다로웠다. 시범 강연 동영상 5분짜리도 있었다. 나는 시나리오를 써서 여러  읽은   카메라 앞에 서서 혼자 글쓰기 강연을 했다. 여섯 번을 되풀이해서 찍고 마지막 동영상을 확인한  첨부해서 보냈다. 합격이었다. 강사 오리엔테이션을 받던  원장님은 "시민대학 역사  최초의 공채 강사들이니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다' 웃었다. 총 170명이 지원했는데 그중 14명만 뽑았다고 하니 무려 10대 1이 넘는 경쟁률이었던 것이다(며칠 전에 다시 강연을 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3월부터 다시 글쓰기 강의를 시작한다).


광고 프로덕션을 다니면서 대학에서 카피라이팅 강의를 6개월씩 두 번 한 적이 있다. 강의 시간엔 세계적 광고 캠페인이나 카피들을 소개하며 마치 그게 내가 만든 것인 양 잘난 체를 했지만 실상은 광고주에게 ‘아이디어가 신통치 않다’며 모멸을 당하고 온 다음날이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나와 광고 카피를 써보거나 하이쿠 짓는 수업을 하며 즐거워했다. 나는 약간 한심한 게 좋은데 광고계는 한심하게 보이는 걸 용납하지 않는 세계였다. 작가가 된 뒤 달라진 것은 언제든 '쓸데없는'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동안은 어딜 가서 무슨 얘기하더라도 광고나 카피에 관련된 얘기로 서두를 꺼내거나 끝맺음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글쓰기는 그 자체가 인생이었다. 내 생각을 뒷받침하듯 박연준 시인은 "문학은 삶을 다루는 분야이기에 삶을 통찰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라고 쓰고 있다(『쓰는 기분』 204P)

쓰는 이야기는 결국 사는 이야기와 같았다. 카피라이터로 살 때보다 작가로 살 때가 훨씬 부자가 된 기분이다. 물론 돈은 회사를 다닐 때보다 훨씬 부족해 한 달에 두 번(주택담보대출금 갚는 날과 신용카드 대금 빠져나가는 날)은 꼭 잠을 설치지만 그래도 광고계에 있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행복하다. 지금은 새 책을 쓰러 청주로 내려와 있다. 하루 종일 이전에 써놓은 메모지와 에버노트에 둘러 싸여 있다. 혹시 원하는 대로 책이 써지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근원적인 공포가 있지만 그래도 책상 위에 '가볍고 경쾌하게'라고 써붙여 놓고 열심히 쓰고 있다. 내가 쓰는 것들은 어쩌면 몽땅 '쓸데없는 글'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내가 쓰고 싶은 걸 쓰고 있으니까. 카피를 쓰는 것보다는 백 배 낫다.


오늘의 띄어쓰기 :
1. 쓸데-없다 [-떼업따] 「형용사」'데'가 의존명사이므로 '쓸 데 없다'처럼 띄어 써야할 것 같지만 '쓸데없다'는 쓸 만한 가치가 없다는 뜻의 한 단어이므로 붙여 써야 합니다.
2. 잘난척하다 ‘잘난 v 체하다', '잘난 v 척하다’로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잘난체하다', '잘난척하다'로 붙여 쓰는 것도 허용됩니다(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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