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2 write
산책은 글을 쓰거나 연구를 하는 사람에겐 영감의 원천이나 다름없다. 아무런 목적 없이 천천히 길을 걷다 보면 머릿속이 맑아져 무념무상이 될 때도 있고 걷잡을 수 없이 상념이 몰려오기도 한다. 아내와 교토에 갔을 때 '철학자의 길'이란 곳을 간 적이 있다. 일본의 철학자이자 대학교수인 니시다 기타로가 이 길을 산책하며 사색을 즐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청주에 혼자 내려와서는 아침마다 뒷산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게 리추얼이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나갈 때도 있고 저녁이 되기 직전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칸트처럼 정확한 시간에 나가서 동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시계를 맞추게 하는 짓 따위는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칸트는 강박증이 있었던 것 같다).
산책을 나갈 때는 가벼운 크로스백 안에 두 번 접은 A4지를 챙겨 넣는다. 혹시나 산책 중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하기 위해서다. A4지를 두 번 접으면 졸지에 8페이지의 메모지가 생겨난다. 즉, 8개의 메모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 한 면에라도 괜찮은 아이디어를 담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뭔가 건져 왔다고 좋아했던 그 메모가 나중에 어떤 글로 발전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만이 안다. 그러나 나는 무신론자이므로 결국 아무도 모른다, 가 결론이다. 그래도 이걸 반복하다 보면 뭔가 건지는 게 분명히 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그게 당연하다 생각하고 돌아오면 된다. 매번 뭔가를 얻어 와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면 그때부터 산책은 휴식이 아니라 고역으로 변한다.
그냥 머릿속에 담아오면 되지 구질구질하게 뭐 그런 짓까지 하냐고?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은 한순간에 나타났다가 빛의 속도로 사라진다. 적어야 한다. 그리고 적은 뒤엔 반드시 그날 저녁에 다시 펴 보아야 한다. 안 그러면 내가 왜 그걸 적어놨는지 이유를 까먹는다. 종이 대신 스마트폰에 메모를 하면 된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손으로 쓰는 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종이 위에 글씨를 쓰는 걸 익혀 왔기에 이제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몸짓이 되었다. 몸은 정신이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손으로 쓰던 감각은 머릿속에만 쓰거나 폰의 자판을 눌러 기록하던 것보다 더 오래 기억되고 응용된다.
만약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두 번 접은 종이가 지폐로 변한다고 한다면 다들 나를 따라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아이디어가 다 돈으로 변한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다만 나를 따라하면 당신의 영혼이 한 뼘쯤 더 성장하게 된다는 말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아, 참. 볼펜도 함께 챙기기 바란다. 산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성질 급하게 혈서를 쓸 순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