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광고주가 신춘문예 심사위원이라면

광고 카피 쓰기와 문학 글쓰기의 차이점

by 편성준

나는 광고 카피라이터를 오래 하다가 글쓰기의 장으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안 된 신인 작가다. 물론 카피라이터 생활을 오래 하면서 그럭저럭 문장 연습은 좀 한 셈이지만 그런 시간들이 글쓰기 실력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문학을 할 생각이 없고 그런 깜냥도 되지 못한다. 아무튼 요즘은 매일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오래,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는데 오늘은 청주에 있는 해인네(해성 인문학 네트워크)에서 저녁밥을 얻어먹고 쌀까지 한 포대 얻어가지고 숙소로 돌아오다가 문득 '광고 현장과 문학 현장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글쓰기로만 놓고 보면 광고 카피나 시(소설)나 기본적으로 다른 이들과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선발되고 우수성을 인정받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다. 그런데 당선작으로 선정된 뒤부터는 양상이 좀 달라진다. 광고계의 '경쟁 PT'를 예로 들어보자. PT는 프레젠테이션, 즉 시안 설명의 준말인데 넓게 말하면 매체에 집행할 광고를 제작하기 전 여러 광고대행사들이 똑같은 조건 하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일정 기간 후 광고 영상과 인쇄물 시안들을 만들어 차례대로 설명회를 하고 낙점을 받는 것을 말한다.


우여곡절 끝에 승리자로 선정되면 대행사 사람들은 한 달 남짓 준비 기간의 피곤함이 순식간에 날아갈 정도로 기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다. 빠른 시일 내에 광고주 담당자나 회장님에게 보여줄 '뉴 시안'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선정된 시안이 있으니 그대로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묻고 싶겠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건 말 그대로 '시험 삼아 만들어 본 안'이기에 회장님과 시청자의 정서까지 고려한 '집행안'은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더하여 프레젠테이션 현장에서 느꼈던 광고주 측의 생각을 최대한 반영해야 하고 회장님이 즉석에서 떠올린 아이디어도 넣어야 한다. 광고대행사는 보통 하나의 안만 가져오는 일이 없고 A, B, C 안을 가져오기 마련인데 어쩌다 셋 다 마음에 들어버리는 날엔 그 안들의 장점만 살린 '짬뽕' 광고를 만드는 경우도 생긴다. 에이, 설마? 하겠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광고는 예술작품이 아니기에 광고주의 입장과 소비자들의 반응까지 예상한 절충안을 생각해야 하고 까다로운 광고 심의에도 대비해야 한다. 그래서 예전엔 깐느나 뉴욕페스티벌에 출품할 작품은 '깐느용'이라고 이름 붙여 따로 만들기도 했었다.


광고에서 벌어지는 이런 과정을 문학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어떤 시인 지망생이 신춘문예에 시를 몇 편 보내 운 좋게 당선이 되었는데 심사위원장이 그 시인을 신문사로 친히 부르더니 "보내주신 시 잘 읽어 봤습니다. 아주 좋더군요. 자, 이제 그 방향 그대로 새로운 시를 다시 써봅시다." 그리고 놀라는 청년을 바라보며 이런 말도 덧붙이는 것이다. "아, 그리고 시가 끝날 때쯤에 인생에 대한 아포리즘을 한 줄 넣으면 정말 완벽해질 것 같은데....... 내 아이디어 어떤가, 김 이사?" "훌륭하십니다. 회장님."

뭐, 대충 이런 그림이라고나 할까. 그럼 그 시인은 "아니, 이게 대체 뭐하는 짓거리야, 이런 무식한 것들!" 하고는 자신의 작품을 회장님 눈앞에서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게 아니라 "아, 예. 알겠습니다. 일단 말씀하신 사항들을 최대한 반영해서 새로운 시를 A, B, C안으로 정리해 보내 드리겠습니다. 내친김에 아예 시리즈로 벌려볼까요? 하하."라고 되묻는 것이다.


여기까지 상상하며 쿡쿡 웃다가 생각했다. 에이, 그래도 광고보다는 글쓰기가 좀 나은 것 같아. 아주 조금.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산책 나갈 땐 A4지를 두 번 접어 가방에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