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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r 06. 2022

성악설보다는 성선설을 믿는 이유

힘들 때마다 힘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학생 땐 막차를 타고 귀가하는 날이 많았다. 늦게까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시험공부, 동아리 공연 준비 등으로 늦을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학교 앞 먹자골목에서  선후배들과 술을 마시다가 먼저 일어서지 못해 그 시간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우리는 막차 시간이 다 되어서야 불현듯 일어나 인사를 나누고 전철역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택시를 탈 돈은 없으니 막차를 놓치면 큰일이었다. 한 번은 막차 시간에 맞춰 을지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한 적이 있었다. 승객들은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냅다 뛰기 시작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2호선을 타려고 반대편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한 남자가 나와 정통으로 부딪혔다. 나는 벌러덩 뒤로 나가떨어졌고 안경다리가 부러졌다. 그 남자는 미안했는지 잠깐 주춤했지만 “에잇!” 하고는 이내 자신이 타야 할 전철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그놈도 그게 마지막 전철이었던 것이다. 바닥에 널브러졌던 나는 안경과 안경다리를 양손에 들고 내가 타야 할 전철이 떠나가는 걸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내가 어떻게 집에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놈과 꽝 부딪혀 무척 아프고 화가 났던 기억만 생생하다. 공공장소에서 뛰지 말자거나 일찍 귀가하는 습관을 갖자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살다 보면 내가 막차를 놓쳤던 스무 살 시절 같은 순간들이 자주 온다. 거의 다 됐다고 생각할 때 엉뚱한 놈이 달려들어 가하는 일격에 쓰러진 경험이 몇 번 있다. 그때마다 어떻게 살아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막차를 놓친 날 귀가했던 기억을 스스로 지운 것처럼  불운 이후의 악전고투도 머릿속에서 '자동 삭제'된 듯하다.


서울에 가서 아내와 함께 소행성 책 쓰기 워크숍을 진행하고 곧바로 청주로 내려왔다. 하룻밤이라도 자고 올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마감해야 할 원고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오자 마자 메모해 놓은 것들을 뒤지며 원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 열 시 반쯤 전화벨이 울렸다. 전에 내 책으로 북토크를 하자고 먼저 초청을 해 주시고 그 이후로도 여러 가지 도움을 주신 지방의 한 서점 대표님이었다. "우리는 뭐, 다 야행성이라 지금 전화해도 안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하."라며 대표님은 사람 좋게 웃었다. 내가 새 책을 쓰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책이 완성되면 꼭 내려와 서점에서 북토크를 하자는 얘기였다. 아울러 책 판매에 도움이 될 만한 작은 팁들도 전해 주셨다. 나는 속으로는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늘 있는 일인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전화를 끊었다. 뭔가 심란한 문제로 아내와 의논을 하고 돌아왔던 터라 사나워졌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 역시 아내가 자고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전화를 걸어 방금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아내도 기뻐했다. 세상엔 괜히 달려들어 나를 쓰러뜨리고 도망치는 놈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잠깐 마음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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