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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r 11. 2022

한밤중에 깨서 한 일들

이제 대선 충격에서 벗어나야죠

입맛이 없어서 저녁에 라면을 끓여 먹었더니 졸렸다. 유신헌법과 안기부를 만들고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기도 했던 김기춘이 농심의 사외이사였다는 것을 알게  이후로 사지도 먹지도 않던 신라면을 끓여 먹었다. 일종의 자해였다.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아침에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보이고 발가락을 소독 거즈에 감싼 상태이므로 불가능했다. 깨진 엄지발톱은 응급처치를 잘해서 그런지 괜찮다. 그제 혼자 술을 마시고 여닫이 알루미늄 문을 닫다 발을 찧었던 것이다. 선거 방송에 흥분해 있다가 저지른 어이없는 실수였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선거 결과 때문 아니겠는가, 옹졸하게 화를 내다 잠이  것도 기억이 났다.      

라면을 먹고 나니 기분이 나쁜 방향으로 졸리길래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먼저 자겠다고 하고는 불을 끄고 누웠다. 원래는 한 새벽 3시쯤 일어날 계획이었지만 눈을 뜨니 12시 전이었다. 청주에 내려와서 이렇게 애매한 시간에 일어난 게 여러 번이었다. 어제는 피곤해서 글을 쓰거나 원고를 고치는 건 포기하고 그냥 이것저것 읽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을 두 편 읽고 영화평론가 이상용이 쓴 『봉준호의 영화 언어』에서 한 꼭지를 읽었는데 글이 좋았다. 난다에서 이런 책도 냈구나, 하고 반가워하면서 읽었다. 읽다가 만 소설책도 꺼냈으나 이미 흥미를 잃어서인지 안 읽혔다. 작가의 문체가 시니컬하고 유머러스해서 처음엔 좋았는데 하도 그 패턴을 반복하니 현실감은 떨어지고 작가의 취향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 같아서 조금은 유아적으로 느껴졌다. 제목과 작가는 밝히지 않겠다. 나와 다른 사람들도 많을 것이니 혹시 나중에라도 굳이 좋다 싫다 가지고 싸우기 싫어서다. 나도 누군가의 추천에 의해 이 책을 샀는데 그렇다면 그는 아직도 이 책을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폰 13으로 갈아타면서 가입했던 디즈니 플러스에 들어가 콘텐츠를 검색하느라 시간을 썼다. 나는 마블 히어로물을 별로 안 좋아해 볼 게 별로 없었다. J.J 에이브럼스가 제작한 게 없나 하고 ‘J.J’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크리미널 마인드》가 눈에 들어왔다. 시즌1의 1편부터 보기 시작했다. 프로파일러들이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해 사건을 해결하는 드라마임은 알고 있었고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리메이크한 것도 한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오리지널을 제대로 보는 건 이게 처음이었다.      

드라마가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악마라는 초자연적 존재를 믿을 필요는 없다. 인간 혼자서도 모든 악행이 가능하니까.”라는 조셉 콘래드의 말을 인용하는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콘래드뿐이 아니었다.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도 그대를 들여다본다’는 니체의 유명한 말도 나오고 에머슨과 처칠도 인용한다. 수사관들이 사건에 대해 얘기하는 도중에 자신의 식견을 말하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엮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디언이 ‘시도하라, 실패하라, 그러면서 성장한다’라는 사무엘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면 하치가 ‘해보는 건 없다. 하거나 안 하거나만 있지’라고 받아치고 바로 닥터 리드가 옆에서 얌체처럼 ‘그건 요다가 한 말이었다’라고 보충설명을 해주는 식이다. 고지식할 정도로 사건에만 집중하는 CSI 시리즈와 달리 이 드라마는 이런 엉뚱한 대사를 즐기는 맛이 있다. 어떤 드라마든 수다스러운 구간이 꼭 필요하고 그럴 때 인용은 큰 몫을 한다. 《웨스트 윙》의 작가 아론 소킨이 그런 면에서는 최고의 경지인데 이 드라마의 작가들도 니체, 콘래드, 처칠은 물론  《스타워즈》의 요다가 한 말, 《스타트랙》에 나온 대사까지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적절한 인용은 교양의 과시 측면은 물론 장식적 효과도 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그 ‘너드스러움’에 약간 마음이 놓이는 구석까지 생긴다. 그런데 아까 얘기했던 그 소설의 작가는 시니컬한 대사와 서브 컬처 인용 재미에 너무 빠져서 거부감을 들게 했으니 역시 적절한 선을 지키는 게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편까지 보고 네 시 반쯤 스마트폰을 켜 페이스북에 들어갔다. 대선 이후 각자의 입장에서 쓴 반성과 원망과 기쁨의 글들을 무작위로 읽었다. 평소에 가끔 찾아갔으나 이젠 보지 않던 극우 인사의 담벼락에도 가 보았다. 드디어 안심할 수 있는 대통령이 당선되어 마음이 든든하다는 그의 말을 읽고 신기해 하긴 했으나 '이재명의 목소리를 매일 듣지 않게 되어 얼마나 다행이냐'는 그의 말을 고스란히 뒤집어 보면 윤석열을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입장이 되므로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선거에 진 민주당 측 인사의 통렬한 반성을 읽었고 ‘경제는 대통령 혼자 살리는 게 아니다’라는 말에 윤석열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전 직장 동료의 글도 읽었다. 민주당 지도부에 ‘이낙연 때문에 졌다’는 문자 폭탄을 보내는 인간말종(내 생각이다)들을 규탄하는 논객의 글을 읽고 나도 혀를 찼으며 이제는 팬덤 정치에서 벗어나자는 페친의 진심 어린 고언도 읽었다.

페이스북 글을 읽으면서 ‘선거 결과는 축구 관전평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축구를 잘 몰라서 그런지 90분 내내 헤매다가도 누가 한 골만 넣으면 모든 해석이 그 골을 넣기까지의 필연 과정으로 변하는 게 신기했다. 이번 선거도 마찬가지다 다들 애썼지만 누군가 먼저 골을 넣은 것뿐이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걸었던 길이 언제는 가시밭길이 아니었던가. 다 새옹지마다’라는 어느 어른의 말씀이 가장 가슴에 와닿았다. 아는 배우가 코로나 19 감염으로 확진된 과정과 이후 홀로 투병하는 모습을 쓴 글을 읽고 격려의 댓글을 달았다. 페친인 김미옥 쌤이 나희덕 시인의 시에 대해 쓴 글을 읽고 고맙다는 댓글도 달고 페이스북을 나왔다. 산책을 나갈까 하가다 아직 날이 깜깜하길래 그냥 불을 끄고 누웠다. 오래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다.

 

이제 일요일이면 두 달 간의 청주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간다. 내가 두 달간 경제활동을 전혀 안 했기에 아내의 고생과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는 또 이겨낼 것이다. 내가 보낸 초고를 대충 읽어본 아내가 ‘일단 잘 읽힌다’는 평을 해줘서 기뻤다. 이제 출판사에 가서 의논을 하고 아직 못 쓴 원고를 더 쓰는 일이 남았다. 서울시민대학 강연 준비도 해야 한다. 그보다 돈을 벌어야 한다. 그건 서울 올라가서 고민해야지. 뭐 어떻게 되겠지. 어제 신문 칼럼 원고료가 들어왔고 지난여름에 썼던 글에 대한 원고료 지급이 늦어져 미안하다는 카톡도 왔다. 나는 이미 받은 줄 알았다고 하며 고마워했다. 쥐꼬리만 한 돈들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백 배 낫다. 이제 쥐꼬리들을 열심히 모아 태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5년간 열심히 살아보자.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죽지 못해 산다는 말만은 하지 말자. 즐기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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