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와 『밝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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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아니 사실은 자주 그러는 편이긴 한데 예전에 읽은 소설이나 영화를 다시 보면 도대체 내가 뭘 보고 저 작품이 좋았다고 혼자 떠들었던 걸까? 하는 부끄러움이 몰려올 때가 있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도 그런 소설이었다. 당시에 나는 최은영의 이 소설과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가 좋았다는 기억만 가지고 있다. 아마 김금희의 소설을 다시 읽어도 그럴 것이다.
'쇼코의 미소'를 다시 찾아본 건 이번 '독하다 토요일'에서 함께 읽고 얘기할 작품이 최은영의 장편 『밝은 밤』이었기 때문이다. '밝은 밤'은 서른두 살에 이혼을 하고 희령이라는 동쪽 도시로 내려간 지연이라는 여자가 그곳에서 친할머니 영옥을 우연히 만나 가까워지면서 할머니의 엄마인 백정의 딸 삼천이와 아버지 박희수, 그리고 이웃집에 살았던 '새비' 아주머니 아저씨 얘기까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에 대해 듣게 되는 장편소설이다. 개성에서 지내던 삼천이(증조할머니) 내외, 새비 내외 얘기는 박경리의 『토지』나 「김약국의 딸들」을 읽는 것처럼 그윽하고 유장했다면 지연과 지우가 바람피운 전 남편을 욕하는 장면은 김애란이나 정세랑이 쓴 글처럼 젊은 느낌이 났다. 새비네와 증조할머니가 울면서 헤어지는 장면, 명숙 할머니가 보내온 편지의 사연 등은 너무나 슬프다. 피란길에 자꾸 쫓아오는 꼬마를 떨쳐내거나 개성에서 키우던 개 봄이를 돌려보내는 등 이 소설엔 헤어지는 장면이 유난히 많은데 그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3대, 4대까지 내려가 평안도 사투리로 그들의 목소리를 불러오는 최은영의 능력에 놀랐다. 그의 소설 전반엔 가부장제의 억압과 스스로의 기만으로 인한 다양한 인간 비극이 깔려 있다. 이전 소설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집에 그의 소설 『쇼코의 미소』와 『내게 무해한 사람』이 있었다.
어제 낮에 『내게 『내게 무해한 사람』에 수록된 단편 「601, 602」를 읽었고 내친김에 데뷔 중편인 「쇼코의 미소」도 읽었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자매학교 견학 차 한국에 와 이주일 간 머물렀던 일본 소녀 쇼코와 한국 소녀 소유가 만나 서른 살 될 때까지 있었던 이야기다. 나는 일본어를 할 줄 알던 할아버지가 쇼코를 좋아하고 두 사람이 편지 왕래를 하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다시 읽어보니 제목은 쇼코의 미소였지만 결국은 소유와 엄마, 그리고 할아버지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소유는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판에 들어가 시나리오를 쓰고 단편영화를 찍으며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초라한 영화 지망생으로 남는다. 소유의 할아버지를 '미스터 킴'이라 칭하며 편지를 보내던 쇼코는 고향에서 친할아버지를 돌보느라 와세다 법학부 입학도 포기하는데 알고 보면 본인이 자살시도를 거듭하던 심각한 우울증 환자였다. 그런가 하면 소유의 할아버지는 세상을 돌아다니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열세 살의 나이에 삼촌의 가게에 취직을 해 쉰 살이 될 때까지 일만 하다가 가까운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집에 틀어박혀 살아야 했던 사람이다. 엄마는 결혼 사 년 만에 사별하고 고집불통 노인과 울기 잘하는 딸과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소설 속 인물들은 다 슬프다. 외국의 모험 소설이라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라는 말이 생각나서였다. 어차피 인간이란 멀리서는 괜찮아 보여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불안과 불행을 안고 있다. 최은영은 이런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작가다. 어딘가 퓨즈가 나가 있는 것처럼 보이던 쇼코를 만난 뒤 화가 나서 추가 요금을 지불하고 비행기를 탄 소유에게 작가는 이런 통찰을 안겨준다. '창밖으로 보이는 현해탄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멀리서 본 사물은 티 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책 마지막에 붙어있는 작가의 후기를 읽었다. '서른 살 여름, 종로 반디앤루니스 한국소설 코너에 서 있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나는 안 되는 걸까, 한참을 서서 움직이지 못하던 내 모습을.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내 삶은 멀리 있었고, 점점 더 멀어지는 중이었다......'로 시작하는 글은 작가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데뷔를 했는지 말해준다. 그 경험은 '쇼코의 미소'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살며 있었던 소유의 절망 속에도 그대로 들어 있다. 주인공이 느끼는 고통과 좌절이 구체적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런 고통과 좌절이 있었기에 나는 이런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서울에 온 쇼코는 소유와 어렵게 화해를 한 뒤 이틀 동안 소유의 자취방에서 소유가 만든 어설픈 단편영화 두 편을 보고 그동안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보냈던 이백여 통의 편지들을 전부 통역해 들려준다. 요리할 시간도 아끼느라 중국 음식을 시켜 먹으며 해 준 번역을 통해 소유는 할아버지의 쓸쓸한 마음과 고달픈 인생을 알게 된다. 2014년 젊은 작가상에서 데뷔한 작가의 첫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으며 심사위원들이 느꼈다고 고백한 '기이한 감동'이란 바로 이런 장면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오늘은 코로나 19 팬데믹 때문에 줌으로만 봐왔던 독토 회원들을 일 년여 만에 직접 만나는 날이다. 모임이 끝나고 다 같이 술과 음식을 즐기기로 했지만 그 와중에 신입 회원 한 분은 가족 중 확진자가 생겨 올 수 없게 되었다. 너무나 아쉽지만 할 수 없다. 그래도 최은영의 소설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를 주고받을 생각을 하니 신이 난다. 해피 새러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