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를 대처하는 애견인의 자세
사춘기,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갱년기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한두해 지나면 나아지겠지 했던 엄마의 갱년기는 매해 더 심해지더니 올해 정점을 찍었다. 아직 갱년기를 겪어보지 않았지만, 곁에서 느껴보기론 갱년기는 참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 같다. 젊을 땐 하루 이틀 아프면 말아버릴 관절통과 근육통이 사라지지 않고 십 분 만에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하는 알 수 없는 병인 갱년기는 젊은 신체를 앗아간 것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자신감과 자존감마저 앗아갔다. 대신 아파 줄 수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거다. 가족들 나름의 노력으로 여태껏 우리 모르게 애써줬던 엄마를 위해 고통을 분담해주고 있다. 나의 담당은 '같이 걷기'다. 언뜻 보기엔 같이 걸어주는 게 무슨 큰 도움이 되겠냐 싶겠다만, 엄마 말로는 큰 도움이 된다니 속는 셈 치고 한번 들어보시길.
우리 집의 저녁 일과는 이러하다. 여섯 시가 땡 하면 남동생과 나는 같이 퇴근을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빠와 통화하며 과연 오늘의 저녁은 뭘 먹을지 골똘하게 생각한다. 집에 저녁을 해먹을 재료가 있는지 체크하고 없다면, 장보기는 아빠 담당. 여섯 시 반쯤이면 모두 집에 집합해 뚝딱뚝딱 저녁을 만든다. 주로 저녁 식사는 엄마가 차려줬지만 포스트 갱년기의 생활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저녁을 먹은 이후에는 착착 각자 자기가 맡은 집안일을 소화한다. 그러고 나면 시간은 일곱 시 반에서 여덟 시가 된다. 이때쯤 되면 지친 엄마가 눕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엄마를 일으켜 산책을 나간다.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걷는 이 시간은 나와 엄마의 암묵적인 룰이다.
적당히 배도 부르고 요즘은 날씨도 시원해서 걷기가 참 좋다. 둘은 걸으며 목이 칼칼해질 때까지 수다를 떨기도 하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걷기에 집중하기도 한다. 왠지 살도 좀 빠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파워 워킹을 하는 날도, 정말 기력이 쇠해 터덜터덜 걷는 날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장대비가 쏟아지지 않으면 나와 걸으려 한다. 처음에는 당최 이렇게 걷는 게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우울증 환자들에겐 규칙적인 생활과 적당한 신체활동이 필요하다는 기사의 한 구절을 믿어 보기로 했다.
가끔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내로 한 바퀴 돌며 이건 어쨌네 저건 어쨋네 평가도하고, 이런 소문이 있다더라 저런 얘기가 있다더라 카더라 통신도 공유한다. 요즘처럼 코로나가 심각할 때는 사람들이 없는 논 길을 걷기도한다. 풀벌레 우는 소리, 귀뚜라미, 개구리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길을 걸으며 전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기도한다. 가볍게는 전 남자친구 이야기부터 서로 서운하거나 기분 상했던 일들까지. 가끔 예민한 얘기를 하다가 서로 길거리에서 싸우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집까지 가는 길을 걸으며 얽힌 감정들을 풀어낸다. 문득 이렇게 엄마를 가까이 이해해 보려 노력해 본적이 있었나 싶었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이임엔 틀림이 없지만, 가까울 수록 그 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그런가, 그래서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걸을 수록 엄마와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저녁 산책을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에게는 하나 더 있다. 바로 강아지. 벌써 7년째 강아지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녀석은 참 똘똘한 편인데(고슴도치 맘이 아니라 진짜요) 나의 생활 패턴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고, 적시적소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산책 가자' 눈빛을 발사한다. 정말 시계가 따로 없다. 딱 일곱 시 반부터는 양보가 없다. 배부르면 눕고 싶어 지는 인간이기에 처음 한두 번은 안된다고 말려도 보고, 밖에 비 온다고 거짓말도 해본다. 그것도 안 통하면 '어허' 목소리를 낮추며 혼내는 시늉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절차가 루틴임을 알고 있는 강아지는 웬만하면 속아주지 않는다. 결국 리쉬를 들고 '내가 졌다'하며 산책 나갈 채비를 한다.
개와 하는 산책은 사람과 하는 것과는 다르면서도 굉장히 비슷하다. 평소에도 강아지에게 말을 자주 걸어 버릇해서 그런지 몰라도 밖에서도 서슴없이 말을 거는 편이다. '안돼', '이제 그만', '가자' 등 꽤 많은 말을 한다. 마치 사람과 대화하듯, 대답을 기다린 다는 듯. 동시에 사람이 아닌 개와 함께하는 산책이기에 뻘쭘하게 서서 기다려야 하는 순간들도 많다. 내 개는 이곳저곳 냄새를 맡고 기둥마다 오줌을 싸야한다. 주인을 닮아 그런지 궁금한게 있으면 절대 그냥 못지나간다. 덕분에 걷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많을 때도 있다. 편의점 골목을 지나다 보면 쌀쌀해진 저녁 공기에 밖에 나와서 맥주 한 잔씩 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가로등 밑에서 다른 견주들과 강아지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면 한참 같이 놀기도한다. 물론 내친구 말고 개 친구.
자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일과가 남아 있지 않은 저녁 시간. 마음을 내려놓고 산책하기엔 가장 좋은 시간이 아닐까. 하루 종일 승모근을 세워가며 긴장하던 시간들은 이미 지나간 시간으로 남고 조금은 어깨에 힘을 풀 수 있는 시간. 가볍게 땀을 내고 집에 들어오면 발갛게 상기된 얼굴들 사이로 왠지 웃음이 난다. 남아 있던 힘까지 모조리 풀어버리면 오로지 샤워하고 누워야지하는 생각뿐, 다른 잡생각들은 어느새 사라져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해 아침 산책의 묘미가 무엇인지 알 수없는 게으른 나지만, 갱년기를 대처하는 애견인으로 저녁 산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