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땡큐
작년 11월경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바쁜 평일 일하는 중에 간단한 저녁을 먹으러 편의점으로 도시락을 사러 가는 중이었다. 편의점 바로 앞 횡단보도를 건너가는데 멀리서 빠르게 달려오는 차 한 대가 달려왔다. 당연히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라서 속도를 줄일 줄 알았는데 그냥 냅다 달린다.
깜짝 놀라며 그 찰나에 차종을 보니, 반짝이는 형광색 랩핑을 한 BMW.
망했다.
그 BMW는 내 눈앞 5미터 정도 전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제동거리가 충분하지 않아 차가 멈추기 전에 나의 왼쪽 무릎을 꿍하고 부딪쳐 버렸다.
아프기도 했지만, 너무 놀라 말이 잘 안 나왔다. 멀쩡히 가는데 차가 달려들어 사람을 치다니. 정신을 차리고 운전자를 보니 20대 초중반의 청년이었다.
운전자는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다. 바쁜 시간이라서 운전을 왜 그렇게 하냐며 짧은 훈계를 하고 혹시 모르니 연락처만 받고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일하는 중이고 조금 바빠서 그러는데 나중에 상태가 안 좋아지면 연락을 드릴 테니 전화번호만 일단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옆에 탔던 동승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네?”
“그런데 많이 아프시면 지금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일하다가 저녁밥 사러 나온 터라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요. “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나중 가서 딴 말하실라고.” (조용하게, 하지만 다 들리게 운전한 친구에게 속삭였다.)
“아놔 시발 안 아픈 거 아녀? “
“지금 뭐라고 했어요? “
그 동승자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바닥에 가래침을 뱉으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정말 영화처럼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걷어붙인 소매 속엔 현란한 용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정말 진부한 클리셰였다. )
“아니 안 아픈 거 아니냐고 했어요. 원래 사람이 아프면 바로바로 병원을 가지 않나? “
너무 어이가 없었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가만히 횡단보도로 지나가는 사람을 차로 쳐놓고 하는 말이라니. 아니. 친 사람이 아니고 동승자가..
“않나? 말이 좀 짧네요? 오케이.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물어볼 수 있어요. 그런데 가는 사람 불러 세워서 담배 꼬나물고 침 뱉고 팔뚝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얘기해도 되는 건가 싶은데요?”
난 어른이니 쿨하게 사과받고 보내려고 또 한 번 인내심을 발휘한다.
“아니 동승자가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지금 시비 거는 거예요? 옆에 탄 사람이 이런 말도 못 해? 웃기네.”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동승자가 끼어들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정상적이진 않은데요. 운전하신 분 안 그래요? 친구분 잘 두셨네요. 동승자분께는! 더 이상 할 말 없고요. 그리고, 나중에 전화할 것 없이 그냥 지금 보험접수 하세요. 문자로 접수번호만 보내주세요.”
운전자는 쿨하게 알았다고 하더라.
일터로 돌아와 10분 정도 지나자 보험접수번호가 문자로 전송됐다. 그리고 접수번호가 전송된 지 30분 정도 후에 운전자에게 전화가 왔다.
“저기 죄송한데 보험접수 안 하고 그냥 합의하시면 안 되나요?”
아마도 보험담당자에게 운전자가 어려서 보험료 엄청나게 오를 거라고 들은 듯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중에 딴 소리 할까 봐 지금 당장 병원 가보라고 하신 분들이. 뭘 걱정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전 병원 가서 아프지도 않은데 몇 주씩 입원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녹취해도 돼요. 병원 가서 검사하고 괜찮다고 하면 그냥 거기서 끝이에요.”
그 이후 며칠 한의원을 다녔는데 이상하게 무릎에서 소리도 나고 오래 걷다 보면 무릎이 덜그럭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2차 병원에서 mri를 찍어보니 <반월상 연골판 파열>이라고 한다. 그냥 보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네.
반월상연골판은 무릎 관절 사이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4.7mm 정도의 얇은 판이란다. 무릎 위에서 봤을 때 반달 모양으로 보여 반월상 연골판이라고 부르는데 한쪽 무릎에 바깥쪽, 안쪽 2개씩 있다. 그 얇은 판이 무릎을 사용할 때 쿠션역할을 하는데 그 쿠션이 찢어진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연골파열로 유명하신 교수님들이 몇 분 보인다. 몇 군데 전화를 해보고 예약을 했다. 외래진료받는데만 2달이 넘게 걸렸다.
내 MRI사진을 본 교수님은 1초 만에
“수술해야 돼요. 무조건 해야 돼요.”
“아니. 수술 말고 보존치료라던가..”
“아니. 수술해야 됩니다. 그리고 빨리 해야 됩니다. 무릎 속을 봐야 정확하게 말을 하겠지만, 파열된 지 몇 년 된 부분도 있고, 이번 사고 충격으로 더 찢어진 부분도 있어서 연골이 갈갈이 찢어져서 flap 상태일 가능성이 많아요. 나머지 부분도 더 찢어질 가능성이 높아 빨리 수술해야 됩니다.”
병원 교수님 설명으로는 50%는 퇴행성, 50%는 충격에 의한 파열이라고 한다.
치료방법은 보존치료, 절제술, 봉합술이 있는데, 내 경우는 퇴행성파열도 있어 보존치료는 힘들고, 혈관이 없는 안쪽 부분이라 절제술을 시행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날짜는 1주일 후로 잡았다. 다행히 무릎관절을 열고 하는 수술이 아닌 무릎에 2cm 정도를 절개해 그 사이로 관절경(내시경)을 넣어하는 수술이다.
편하게 일을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걱정했지만, 다행히 수술전날 입원하고 다음 날 수술 후 그다음 날 퇴원도 가능하다고 한다.
우연히 사고가 났는데, 우연히 불편했던(못 느꼈지만) 무릎을 치고, 우연히 공격적인 동승자를 만나서 , 무릎수술까지 하게 됐다.
정말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다.
사고 당시에는 나이 어린 친구가 말도 험하게 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몰고 가서 많이 억울했지만 지금은 그 동승자에게 조금은 고마운 마음도 든다.
어쨌든 퇴행성 연골파열도 있었는데 이 기회에 발견을 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땡큐.
현재의 나
<무릎은 조금 아프지만 어린 친구니 그냥 보내줘야겠다. >
미래의 나
<안돼! 그냥 보내면 안 돼! 너의 무릎은 박살 났어! 에잇! 동승자를 이용해야겠다. 시비 걸어버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