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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른 자리

내일도 씩씩한 발걸음을 내딛으리라

by 지뉴

십여 년 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중간에 몇 번 잠시 머물다 온 적은 있었지만 누군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고, 내가 나고 자란 동네에 가 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손주들을 봐주기 위해 엄마가 주로 우리 집에 함께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엄마의 고향집과 그곳에 있는 내 어렸을 적 물건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고향에 다녀왔다.


내가 어렸을 적 고향은 삼대가 살을 부대끼며 오순도순 살던 정겨운 곳이었다.

손주들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껴준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고,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엄마처럼, 친구처럼 나를 보살펴주고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준 이모들이 있었다. 부모님의 빈자리를 가득 채워준 가족들이 있었기에 나는 사랑에 목말라하지 않아도 되는 성장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 후로 강산이 몇 번은 변하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할머니, 할아버지와 셋째 이모는 돌아가시고 나머지 이모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명절이면 이모들이 모이는 구심점이 되어주던 할머니의 부재는 우리 가족의 명절 풍경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가족들의 빈자리가 늘어가고, 남아 있는 가족들 간의 거리도 멀어졌다. 문득, 세월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슴 한편이 서늘해져 온다.


엄마는 고향집을 정리하고 나와 함께 살기로 했다.

아빠가 안 계신 고향집을 홀로 지키는 엄마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앞으로 남은 여생 동안 나와 더 많은 시간과 추억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싶다. 하지만 한편으론, 독립심 강한 엄마가 나와 함께 하겠다는 어려운 결심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건강상의 문제라는 게 안타깝다. 그러고 싶어서 한 결정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어서 한 결정 같아 엄마를 바라보는 내 맘이 편치만은 않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사라져 가는 것들에 익숙해진다는 걸까?

짐 정리를 하며 엄마는 웬만한 것들은 다 버리고 처분하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 집에 짐들을 둘 곳도 없거니와 오래된 짐들을 꾸역꾸역 챙겨 와 봐야 본인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거였다. '필요 없는 짐들'이라고 말하면서도 엄마는 그것들을 떠나보내는 게 영 섭섭해 보이는 눈치였다. 자신의 추억이 깃든 세월은 곧 그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리라. 해서, 그 세월을 함께 해 온 물건들은 분명 단순히 짐만은 아닐 것이다.


엄마의 팔짱을 끼고 옛 동네를 천천히 거닐었다.

내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알알이 박혀있는 골목길을, 시장을 엄마와 함께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이제 엄마도 이곳을 떠나고 나면 내가 더 이상 고향에 올 일은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불현듯 코끝이 찡해졌다.

나는 내 유년의 기억들과 정성스럽게 작별하듯 눈으로 하나하나 담아가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다 어린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 손 잡고 자주 가던 재래시장의 풍경을 맞닥뜨리고 가슴이 헛헛해져 왔다. 벽을 따라 줄지어 앉아 좌판 가득 야채를 팔던 아주머니들이 한 분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빈 벽이 쓸쓸해 보였다.

"엄마, 여기 아주머니들 다 어디 갔어?"

"치매에, 저 세상 가고... 다들 떠났지."

내가 오기 전 이곳에선 이미 수많은 작별들이 고해지고 있었다. 순간, 주인 잃은 벽만큼 내 맘도 갈 길을 잃은 듯했다.


맘을 추스르고 엄마 팔을 꼭 잡고 다시 길을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그래도 여전히 내 곁에 있는 엄마와 함께 걸을 수 있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들의 씩씩한 목소리로 가득했던, 그러나 지금은 적막마저 감도는 시장을 바라보며 엄마는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 세월이 훑고 지나간 자리를 마주한 엄마의 마음이 나보다 더 애틋했을 것이다.


세월은 많은 것들을 변하게 한다.

반짝반짝 빛나던 물건들의 빛을 퇴색하게 하고 내 곁에서 함께 숨 쉬고 웃던 사람들을 데려가기도 한다. 그러나 또 새로운 것들과 새로운 사람들을 내게 선사해주기도 한다.

때로는 흐르는 세월에, 그 세월이 데리고 가는 것들에 마음 한 구석이 아파오더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주눅 들지는 않을 것이다. 고향의 시장에서 내 곁에 있는 엄마 팔을 꼭 붙잡고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던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내게 있는 소중한 것들을 더 소중히 아끼며 씩씩하게 앞으로 전진해 나가리라.


오늘 밤에도, 내게 남은 수많은 날들을 하루하루 씩씩하게 펼쳐낼 내 재능을 위해 짝꿍과 함께 건배 한 잔 해야겠다.

여러분들도 모두,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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