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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 이야기

팍팍한 삶을 빛나게 해주는 동반자

by 지뉴

덕질 :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




최근 첫째가 탐정 이야기를 다루는 일본 만화에 푹 빠져 방안을 온통 관련 굿즈들로 채워나가고 있다. 주기적인 애니메이션 시청과 더불어 만화 전집 사모으기, 아크릴 스탠드 수집에 이어 독학으로 일본어 공부하기까지. 필요한 곳에 써야 하는 용돈을 저렇게 다 탕진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다.


학교에서 내주는 독서 과제에는 소홀한 아이가, 시키지도 가르쳐주지도 않은 일본어를 밤이고 낮이고 스스로 공부하는 것을 보며, 어떤 대상으로의 관심과 열정이 삶에 대한 의지를 얼마나 불태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요즘 아이가 용돈을 쓰고 있는 행태를 '탕진한다'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이는 '덕후로서의 삶'을 통해 삶에 대한 흥미와 열정을 자발적으로 키워나가는 기특한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삶은 ‘시간과 스트레스와의 싸움’이며, 이 싸움을 잘 극복해나갈 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물들을 한번 생각해보자. 동물들은 먹이를 구하기 위한 활동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예를 들어, 새들은 먹이활동을 대략 두 시간에 한번 정도는 해야 한다. 그런데 자연 상태에서 먹이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새들은 인간보다 훨씬 좋은 시력으로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고, 그렇게 찾은 먹이를 먹고, 먹은 만큼 자주 배설하고, 또 먹이를 찾기 위해 나선다. 새끼가 태어났을 때는 먹이 구하기 활동이 더 활발해진다. 이쯤 되면 살기 위해 먹는 건지 먹기 위해 사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이 '먹기 위한 삶'에서 새들은 분명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선사시대 이후 농경생활로 정착하면서 먹이를 잡으러 다니며 사는 삶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그만큼 잉여의 시간이, 그 시간과 씨름해야 하는 나날들이 늘어났다. 물론 현대인들에겐 직업으로 귀결되는 사회생활이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일이나 활동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얌전히 푸는 데에 취약하고 지루한 시간을 견뎌내는 인내심도 약하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활동적으로 풀기 위해, 남는 시간들을 어떻게든 지루하지 않게 버티기 위해 좋은 두뇌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만들어냈다. 독서, 각종 스포츠와 예술활동도 결국에는 이러한 '버티기 위한 욕망'과 연결되는 것이리라.


덕질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다, 고 생각한다.

내 주변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특히, 처지지 않고 건강해 보이는 텐션을 유지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언가의 '덕후'들이다.


친한 동료 중에 '문구 덕질러'가 있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문구점에 간다. 가급적 큰 문구점이면 더 좋다고 말한다. 새로 나온 문구들이 있나 살펴보고 맘에 드는 제품이 있으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도 사서 수집하는 기쁨을 누린다. 이런 수집품들은 곁에 두고 보는 것 자체로 좋고,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당*마켓'에서 판매한다. 이 '당*마켓'도 또 다른 그녀의 덕질 대상이다. 이렇게 그녀는 스트레스를 풀고 문구들을 통해 삶에 신선한 피를 주기적으로 수혈하며 건강한 텐션을 유지한다.


내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신랑은 요즘 수영에 꽂혀 산다. 수능시험 눈치작전을 방불케 하는 수영강습 등록을 정기적으로 하고, 시간 날 때마다 수영 관련 너튜브 영상을 돌려보며, 갖가지 수영모와 수영복, 수경을 사모으고 있다. 이렇게 하나하나 늘어가는 수영 관련 용품들을 펜트리 한 편에 고이 모셔두고 틈 날 때마다 흐뭇한 마음으로 꺼내 본다.

둘째는 '로**스'라는 게임 덕후다. 아이템을 모으고, 게임을 위해 스스로 영어 스크립트를 만들며, 역시, 시키지도 않은 영어 공부를 하고, 컴퓨터 주변기기를 알아가고 있다. 덕분에 영어 과외비를 아끼고 있으니 아이템을 모으느라 용돈을 탕진(?)하는 것을 탓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다.

나는 종이책 덕후다. 특히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소설 같은 탐정 추리물과 스릴러 장르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새책이 나오면 초판 1쇄 본-최근에는 작가의 친필 사인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더 그런 것 같다-을 득하는 것에 타인들이 이해 불가할 만큼의 자부심을 느낀다. 더불어 방탄소년단과 새(bird) 덕후이기도 하다.




덕질에는 돈이 많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덕질에 드는 돈만큼 '제대로 쓰이고 있는 돈'이 있을까 싶다. 한번 사는 인생을 더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데 투자하는 돈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큰 사치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까울 것이 없겠다 싶다.


그런 의미에서 반성해본다. 첫째가 더 많은 용돈을 탐정 캐릭터 굿즈에 쏟아붓더라도 결코 혀를 차거나 힐책하지 않겠다고. 비록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사라고 응원하지는 못할지언정. 그리고 행복한 내 덕후 활동을 위해 마음속으로 기원해본다. '올해 그래미에서는 꼭 방탄소년단이 수상의 기쁨을 누리게 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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