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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알 세 쪽이 내게 준 가르침

세상 모든 만물은 나의 선생님

by 지뉴

아이가 학교 과제라며 강낭콩 세 알을 가지고 왔다. 강낭콩을 심은 후, 자라는 과정을 관찰해 보고서를 제출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줏빛 강낭콩이었다. 길 가의 작은 돌멩이처럼 건조하고 딱딱해 보였고, 당장 밥반찬으로 요리하면 될 것 같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그 단단한 껍질 속에서 새로운 생명체 같은 것이 뻗어 나오리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화초에 관한 한 '플래티넘 똥손'임을 자랑하는 나는, 강낭콩이 성장하는 사진을 어디서 구해야 하나, 고민됐다. 하지만 '교육적 차원'에서 일단 아이와 함께 작은 화분에 흙을 채워 강낭콩들을 한 알 한 알 심었다. '어떻게 되리라'는 기대는 접어둔 채로.


역시나, 며칠이 지나도록 강낭콩을 심은 화분에는 눈곱만큼의 변화도 없었다. 아이는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는 화분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한 번' 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작부터 기대를 접고 있던 엄마와 달리, 아이는 매일같이 화분을 살펴보며 강낭콩들이 파란 싹을 틔워주기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렇게 20여 일이 흘러갔다...


하룻밤 사이 고개를 내민 강낭콩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를 내다보는 데 뭔가 달라진 기운이 느껴졌다. '이 느낌은 뭘까?'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베란다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밤사이 강낭콩 하나가 싹을 틔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것도 '빼꼼' 정도가 아닌, 보란 듯이 쑥 자란 키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우와!" 흡사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듯, 나도 모르게 감동 섞인 커다란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소리 높여 아이를 불렀다.


"OO아~ 드디어 강낭콩 올라왔어!!"

"진짜아~~?!!"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에 내 쪽으로 달려왔다.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기쁨과 반가움도 컸던 모양이다. 바람결에 인사하듯 살포시 흔들리는 강낭콩을 마주한 아이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날 줄 모르고 한껏 신이 나 재잘재잘 거렸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그 순간'이 아이에게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아름다운 선물'이 된 것 같아 나도 덩달아 미소가 새어 나왔다.


'저기서 뭐가 나오겠어?' 라며 은근히 강낭콩을 무시했던 내 마음이 미안하고 창피했다. 어여쁜 강낭콩을 마구마구 칭찬해주고 싶었다. 지레 쉽게 포기하고 있었던 내게 가르침을 주고 싶기라도 했던지, 오랜 시간 강낭콩 세 알은, 햇살과 물을 온 힘을 다해 빨아들이고 자신과 서로를 다독여갔나 보다. 그리고 기어코 흙을 뚫고 올라와 우리를 맞이해준 기특한 강낭콩들...

일단 한 번 싹을 틔우기 시작하자 강낭콩들은 무서운 속도로 쭉쭉 뻗어 올라갔다.


때때로 작은 생명체로부터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그 깨달음의 감동이 크든 작든 간에.

아이의 학교 과제인 '관찰 일지'를 함께 써나가며 나도 같이 배웠다. 우리가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애쓴다면, 비록 지금 당장은 아무 성과 없어 보일 지라도 ‘언젠가’는 '팡'하고 우리의 잠재력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강낭콩이 우리에게 몸소 보여줬던 것처럼. 그리고 그 '언젠가'는 우리가 포기하려는 그 '마지막 순간'에 다가올 수도 있음을...

세상 모든 생명체들이 내 '선생님'이 될 수 있음을 새삼 느끼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제 화분 속 강낭콩들은 더 이상 강낭콩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푸르고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한 번 잠재력을 터뜨린 이가 또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듯이….

요즘 난 아이와 번갈아 가며 매일같이 물을 주고 있다. 물을 줄 때마다, 내게 '가르침'을 준 강낭콩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인다.

앞으로도 이런 학교 과제라면, 성실한 ‘어른 학생’이 될 각오로, 두 팔 벌려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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