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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Sep 06. 2023

다시, 독서왕으로!

나의 독서 편력은 다분히 엄마로부터 유전된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을 사랑하는 엄마는 심지어 이상형마저 책을 가까이하며 점잖고 기품 있는, 학자풍의 남자다. 그런 엄마가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을 했으니, 애당초 사랑에 대한 기대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던 결혼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이따금 자조 섞인 어조로 말했다. 아빠는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라고.

여기에서 '문(文)'은 아빠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었단 사실에서, '무(武)'는 아빠가 싸움에 능숙하고, - 아빠는 학창 시절 최고로 손꼽히던 명문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싸움 잘하는 녀석으로 꽤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 엄마에게 힘을 몹시 잘 부린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기인했을 터다.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로 인해 모든 사회적 활동이 끊기다시피 한 엄마가 그나마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활동 영역이 독서였다. 엄마는 책을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인데, 한때는 엄마의 '게걸스럽기'까지 한 독서 편력을 뒷받침하느라 우리 집 거실의 전면책장은 내가 줄줄이 사재어 놓은 책들로 인해 북새통이 될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쩐지 엄마가 읽을 책을 사는데 드는 돈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번 읽고 나면 두 번 다시 펼쳐들 일이 거의 없었던 책들이었지만. 엄마가 내게 읽고 싶은 책을 말하면, 신이 난 나는 인터넷 서점의 장바구니에 부리나케 책들을 쟁여놓았고, 그 책들이 사라지기라도 할 세라 한 달에도 몇 번씩 결제버튼을 눌러댔다. 그렇게 들여온 책을 읽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내심 흐뭇했다. 그 시간만큼은, 책 속의 세상을 넘나들며 행복한 상상 속에 빠져있는 엄마를 볼 수 있었다. 책을 읽는 엄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평화로웠다.



그랬었던 엄마도 컨디션이 악화된  나머지 지난 몇 년간은 책을 거의 읽지 못했다. 엄마는, 엄마의 가장 큰 '인생의 낙'이었던 독서를 하지 못하자 몹시 답답해했고, 왕성하게 독서활동을 하던 그 시절을 너무도 그리워했다. 스스로의 의지에 반해, 어쩔 수 없이 독서에서 멀어진 엄마는 그저 누워있거나 멍하니 앉아 있는 것으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그러다 며칠 전, 억지로 끌고 나간 저녁 산책에서 급기야 엄마는 내게 말했다.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아. 이렇게 살다가 저세상 가면 어쩌나, 답답하고 절망적인 마음이 이루 말할 수가 없네."


웬만해선 먼저 말을 잘하지 않는 엄마가 이리도 선뜻 속마음을 드러낸 걸 보면,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엄마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나쁜 딸로 살았던 나는 또다시 애처로운 표정의 ‘착한 딸'로 돌아왔다.



산책을 마친 후, 나는 최근 재미있게 읽었던, 김순옥 작가님의 <초보 노인입니다>를 엄마에게 슬며시 들이밀었다.


  "억지로라도 한번 읽어 봐. 아프다고 가만히 있으면 더 아프기만 하지. 엄마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등장하니까 제법 흥미롭게 읽힐 거야."


이렇게 말하는 나를 엄마는 미덥잖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엄마 옆에 책을 남겨두고 돌아섰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지금쯤 어쩌고 있으려나 싶어 열린 방문 틈으로 슬쩍 동태를 살펴보니, 내가 준 책을 펼친 채 독서를 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책장이 제법 넘어간 상태로.

그러고 한 시간이 더 지나고 난 후, 이번에는 엄마가 책을 손에 쥔 채로 내게 다가왔다.

  "책 다 읽었다."

이렇게 말하는 엄마의 얼굴은, 아빠 구두에 쌓인 해묵은 먼지를 말끔히 닦아내고 난 후 아빠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표정을 닮아 있었다.


  "컨디션 좀 괜찮은 거야? 엄청 빨리 읽었네?"

  "억지로, 겨우겨우 다 읽었다."

  "억지로라도 읽은 게 어디야?!"

  "책 내용이 짧게 끊어져 있어서 그래도 봐지네. 양도 그리 많지 않고."


그러더니 엄마는 살짝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파친코>가 읽고 싶은데… 거실 책장에 보니 있더라고….”

  "응. 읽어 봐. 재미있어!"

  "너무 길어서 엄두가 안 나네. 내가 (상태가) 이래 가지고 읽을 수 있겠나 싶다."


엄마는 어쩐지 '읽을 수 있다.'는 격려를 받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억지로라도 책을 읽게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은 나는 옳다거니,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책, 오바마가 추천한 거잖아. 엄마가 좋아하는 그 오바마 말이야." - 엄마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팬이다 -

이 지점에서, 지적이고 기품 있어 보이는 남성상을 좋아하는 엄마의 취향이 제대로 저격된 모양이었다.


  "그래…? 추천한 거면, 책을 다 읽어봤다는 말인가?"

  "그럼! 책 읽어보지도 않고 추천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오바마가 싹 다 읽어보고 추천한 거지."



불현듯 엄마의 눈빛과 목소리가 흔들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듯 보이던 엄마는 이내,

  "그럼, 한 번 시도해 봐야겠다."라고 말했다.

<초보 노인입니다>를 읽으며, 엄마는 독서왕이었던 그때로 잠시나마 되돌아간 기분이었을까?

‘오바마 추천' 언급에 조금 힘이 나 보였던 엄마는 그 이후 며칠 만에, 저자가 30년의 세월에 걸쳐 썼다는 <파친코> 1,2권을 독파했다.



돌이켜 보면, 상황이 받쳐주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엔 더 힘든 상황으로 내몰리곤 했었던 것 같다. 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용기 내 (어떤 일에) 도전하면 생각 이상으로 인생은 내게 많은 기회들을 만들어 주었다. 이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일까.

힘든 와중에도 기어이 목표한 것을 해냈기에 내게 찾아온 ‘작은 성취감'이, 좀 더 힘찬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엄마의 독서활동에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그 시절 독서왕으로 돌아가 온갖 책들을 게걸스럽게 해치울 엄마가 보고 싶은 나는, 오바마가 추천한 책 리스트에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찾아볼 참이다. 만약 그의 리스트에 우리나라에 발간되지 않은 책들만 그득하다면, 거짓말이라도 꾸며내 책을 디밀어볼까 싶기도 하다.



때마침, 우리 집 거실 책장에 지금의 상황에 아주 적합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온다.

오바마의 또 다른 추천작,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

제목은 슬프지만 표지는 산뜻하기 그지없는. (앵무새 녀석이 겉표지를 살짝(?) 뜯어먹긴 했으나)

게다가, 이 책은 한국인 엄마와 딸의 이야기이지 않은가! 오바마의 독서 취향이 몹시도 마음에 드는 순간이다.

엄마의 이상형인 그의 서재가 태평양처럼 너르고 또 너르기를 소망해 본다.

엄마의 이상형이 추천한 작품들(자몽이 녀석이 훑고 지나간 자리가 애처롭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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