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뉴 Sep 04. 2023

대륙횡단열차 2022 - 2

거부할 수 없는 제안

(1/2)에 이어,


K가 기차의 식당칸을 경험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륙횡단열차의 식당칸은 열차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읽으며 K가 상상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갈하게 세팅된 테이블 위에 놓인 고풍스러운 접시들, 드문드문 앉아 기품 있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승객들. 쉴 새 없이 청아하고 경쾌하게 울려대는, 접시와 포크가 부딪히는 소리. 그 공간 옆을 흐르듯 스쳐 지나가는 대지와 하늘이 어우러진 무한대의 풍경....

노신사와 K가 식당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풍경에 시선을 담근 사이, 객실칸에서는 보지 못한 자그마한 마을이 멀리 내다보였다. 서른 가구가 채 될까 말까 한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이었다. K는 그 모습이 어쩐지 낯설었다. 단순히 이국의 풍경이어서 그렇다고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이는 점이 있었다. K는 이러한 자신의 느낌이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 아!

K의 입에서 일순간 탄성이 새어 나왔다. 풍경이 주는 오묘함은 바로 자신의 상상과 완벽히 일치되는 모습에서 나오는 것임을 K는 깨달았다. 집들의 생김새. 그것은 K의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던 20세기 초반 유럽의 한 마을을 닮아있었다. 물론, 유럽은 오래된 건물들이 흔하디 흔하게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지금 K의 눈앞으로 나란히 열 지어 있는 집들은 마치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듯한 새것의 느낌을 발하고 있었다. K가 놀란 눈으로 바깥 풍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사이 노신사가 K에게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 무엇을 먹겠소?

어느새 가져온 것인지 노신사가 눈을 빛내며 메뉴판을 들이밀었다.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던 K는 메뉴판에 적혀있는 글자를 채 읽을 새 없이, 시선이 가는 사진 속 메뉴 위로 손을 짚었다.


- 저는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K가 밖의 풍경만큼 메뉴들마저 독특하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K가 선택한 메뉴는 불그스레한 자태가 흡사 플라멩코를 추는 스페인 무희의 치마폭을 닮아 있었다. 덜 익은 듯한 고기가 겹겹이 쌓여있는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서 움직이는 듯 생생해 보이는 요리였다. 긴 이름을 발음하기가 쉽지 않은 메뉴였다. 삶에 대한 열의가 온전히 사라져 버린 지금, K는 오히려 곧이라도 무희의 발뒤꿈치처럼 열정적으로 활개 칠 것 같은 메뉴에 시선이 쏠렸다.


- 탁월한 선택이오! 안 그래도 그 메뉴를 추천하려던 참이었소.

이렇게 말하는 노신사의 뒤편으로 대륙의 햇살이 넓게 비쳐 들었다. 순간적으로 눈이 부셨던 K가 잠시 눈을 감았다 이내 실눈을 뜨고 식당칸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클래식한 느낌의 복장을 한 승객들이 평온한 얼굴로 저마다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다들 행복해 보이네요. 저만 불행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때였다. 노신사가 주머니춤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 들어 입가를 훔쳐내더니, 앞에 놓인 물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수건을 든 손을 탁자 위로 톡톡, 정확히 두 번 두들겼다. 그건 마치 어떤 신호와도 같다, 고 K는 생각했다. K는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 혹시 이름 말고는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없소?

이렇게 묻는 노신사의 눈을 보며 K는 무슨 질문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 글쎄요... 어르신은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요?

- 젊은이가 가고 있는 곳과 같은 곳이오.

또 한 번 K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그는 노신사에게 자신의 목적지를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깃든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K를 마주한 노신사가 말을 이었다.


- 어차피 우리 인생의 종착역은 다 같은 곳이 아니던가? 하하하~

- 아... 네. 하, 하...

노신사가 또다시 농담을 한 것이라 판단한 K가 그제야 얼굴을 펴며 간신히 웃음소리를 뱉어냈다.


- 사실, 나는 직업상 이 기차를 자주 이용하오.

일흔 가까이 되어 보이는 노신사가 업무상 기차를 애용한다는 말에 K는 순간 부러움을 느꼈다.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했다. 노신사에게선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삶을 버틸 수 있을 만한 재력이 풍겨 나왔기에. 물론 그건 단지 K의 착각일 수도 있으나, 이런 면에서 그의 직감은 여태껏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 내가 재미있는 제안 한 가지만 해도 되겠소? 물론, 이건 나한테만 재미있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젊은이가 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여준다면 내 남은 삶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듯도 한데…?


노신사의 목소리에는 신뢰를 줄 만한 분위기와 함께 어딘지 모르게 애처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K는, 자신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꿈같은 만찬을 선사해 준 이 노신사에게 자신도 무엇인가 해주고 떠나야겠다는 선의의 욕망이 일었다. K가 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노신사가 품에서 만년필로 보이는 낡은 펜을 꺼내 탁자 위에 놓인 메모지에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끄적였다. 노신사가 메모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식당칸 직원이 옆눈길로 노신사를 흘깃 쳐다보더니 K에게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주문한 요리를 식탁 위로 단정하게 세팅했다. K는 요리에서 풍겨 나오는 달달한 향기가, 객실칸을 떠나오기 직전 코끝을 스쳐갔던 그 내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노신사가 K에게 고갯짓으로 음식을 먼저 먹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거부하기 힘든 몸짓에 K는 앞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천천히 고기를 커팅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순간, 상그러운 향과 함께 처음 느껴보는 짜릿한 기운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K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고기 한 점에 K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 맛이 어떻소?

메모를 마친 듯 펜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노신사가 물었다. K의 눈에 어쩐지 노신사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K는 가슴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감추기라도 하듯 두어 번 크게 기침을 했다.


- 큼큼. 맛이 아주, 좋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K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노신사가 메모지를 펼쳐서 K에게 건넸다. 메모지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11월 19일. 오후 6시. 페테르스토크. 카페 '더 라빈츠키'.

 11월 26일. 오후 5시 30분. 블라디쉬나지. '바르토크 칼리지' 광장 5-6 지점.

 12월 3일. 오후 5시. 압두르칸. '회테크 성당' 내. 오른편 다섯 번째 열.

....'


메모에는 일주일 간격으로 총 일곱 개의 장소가 적혀 있었다. 아마도 대륙횡단열차가의 기착지인 듯했다. 줄줄이 이어지던 날짜는 2022년 12월 31일 토요일에 멈춰 있었다. 종이에 적힌 장소 중 두세 군데를 제외하고는 K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이었다. 메모를 읽어 내려가던 K의 얼굴이 알 수 없는 표정에 젖어들었다.


- 이게 다 무엇인가요?

- 그곳에서 무엇이 젊은이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소? …아!

노신사는 K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은 않고,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집게손가락을 곧게 세워 보이더니, 12월 31일이라 적힌 맨 아랫줄 밑에 한 줄을 더 추가해 적었다.


'1월 1일. 오후 1시. 2023년. 더 방크 츠반'


그러고 난 후, 노신사는 자신의 눈빛을 닮은 파란색 겉표지의 자그마한 책자 하나를 K에게 건넸다. 표지에 큼지막한 글씨로 '더 방크 츠반'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K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K가 책 표지와 노신사의 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내게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소.

이렇게 말하는 노신사의 표정은 해탈한 수도자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 보아하니, 나는 젊은이가 '모든 것'이라고 일컫는 것을 가지고 있는 듯하고, 젊은이에게는 내가 가지지 못한, 삶의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으니, 그것을 서로 맞바꾼다고 생각하고 내 말대로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소? 젊은이가 결코 손해 볼 일은 없을 듯한데…

어차피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온 이곳이었다. 노신사의 말처럼 K가 밑질 것은 없었다. K는 혹여 손해 본다 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다. 마지막을 약속해 둔 마음이 결정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K의 마음속에서 불현듯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대감 같은 것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고 있었다.


- 제가 무엇을 하면 되는 건가요?

- 이제 보니 나약한 젊은이는 아닌 듯 하구만...

왠지 노신사의 말끝에 '왜 그런 결심을 한 것이오?'라는 물음이 생략되어 있는 것 같았다.


노신사의 말인즉슨 이랬다. 자신은 지인들에게도 미처 말하지 못한 불치병에 걸렸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이 기이한 질병은 죽음을 앞당길 정도로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조금씩 기력을 잃어 결국엔 생의 그 어떤 즐거움도 맛보지 못하게 하는, 어쩌면 삶에 더 지독한 영향을 끼치는 힘을 가졌다. 등등, 블라블라블라…


- 그런데 그것이 이 메모와 어떤 상관이 있는 건가요?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 K를 흘금 쳐다보던 노신사가 잠시 차창밖을 내다보더니 시선을 다시 K에게로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 돌이켜 보니, 내가 생애 온갖 행복과 즐거움을 느껴보았지만, 단 한 가지는 해보지 못했다 싶었소.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자, 내게 크나큰 기쁨을 줄 그것을 말이오.

- 그게, 무엇인가요?

- 사람을 살리는 일. 그것만큼 훌륭한 일은 없는 듯 하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잠시 흔들리던 K의 눈빛이 또다시 미심쩍은 기운을 풍기며 노신사에게로 향했다.


- 나 자신을 위해, 젊은이의 시간을 지켜주고 싶소. 어떻게, 한번 해보겠소? ‘가상'의 것에 자신의 영혼까지 거는 마음이라면, 내 제안이 훨씬 더 미더울 듯 하오만. 나도, 이 메모도 당신의 눈앞에 이렇듯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오.

노신사가 K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을 위해 K의 시간을 지켜주겠다'라고 말하는 진지한 노신사의 눈을 마주하며, K는 마치 마술에 걸린 듯 그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노신사에 의하면 K는 메모지에 적힌 시간에, 해당 장소를 방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추후의 일은 그곳에 가보면 알게 될 것이며 비용 같은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노신사는 말했다.


- 거기에 적힌 장소들을 모두 방문하고 나면 그 책자를 가지고 마지막 장소 근처에 있는 ‘더 방크 츠반'을 찾아가시오. 거기에 들어있는 나의 또 다른 메모와 함께.

K가 책자를 열어보려는 찰나, 노신사가 자신의 손을 K의 손 위로 덥석, 포개었다.


- 메모는 반드시 일을 다 마치고 난 후 열어보도록 하시게!

노신사가 또다시, 이번에는 반대편 눈으로, 가볍게 윙크를 해 보였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기차는 눈으로 뒤덮인 역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철도변에 가지런히 늘어선 채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키 큰 나무들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하는 듯했다. 그때 노신사가 흠흠, 소리를 내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 미안하지만 나는 먼저 일어서야겠소. 나머지 음식 천천히 들고 가시오. 난 이번 역에 내려야 하오. 어쨌든, 그 일을 하고 안 하고는 전적으로 젊은이의 의지에 달린 것이라오. 건강한 새해를 맞이하길 바라겠소!

K는, 마지막 말을 서둘러 마친 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재빠른 동작으로 일어서 나가는 노신사의 뒤를 쫓았다. 작별의 인사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노신사는 식당칸을 벗어나 휘적휘적하는 걸음으로 좀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플랫폼에 내려섰다. 이윽고 기차의 열린 문으로 대륙의 차디찬 바람이 불어왔고, 향긋한 내음과 함께 노신사의 손수건이 팔랑이며 K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K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차가운 바람이 스치듯 지나간 자리에 신기하게도 따스한 기운이 스며드는 듯했다. K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노신사는 사라진 후였다. K는 자신의 발아래에 떨어진 손수건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고딕양식의 저택 그림이 새겨진 손수건 한켠에는 다음과 같은 한 줄이 정성스럽게 수 놓여 있었다.


'자살횡단열차, 1922. Z. D.'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바라보며 서 있는 K를 밀치며 금발 머리의 아이와 빨간 머리의 아주머니가 손을 맞잡은 채 지나가더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빨간 머리의 여성이 뒤돌아 날 선 표정으로 K를 올려다보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언어를 쏟아냈다. 그 순간, K는 누군가 자신의 뒤통수를 세게 내려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머릿속 가득 전해지는 얼얼한 느낌을 어쩌지 못한 채 모녀를 바라보고 있던 K의 눈이 놀라움으로 점점 커져갔다. K는 이내 손수건을 쥔 손에 힘을 더 주며 무엇엔가 홀린 듯 몇 번이고 반복해 혼잣말을 했다.


- 2023년 1월 1일. 우선, 그때까지만… 그래, 그때까지만….


이윽고 굳게 다물어진 K의 입술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미소처럼 옅게 번져갔다.


- 끝.

                     

매거진의 이전글 대륙횡단열차 2022 -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