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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Sep 02. 2023

대륙횡단열차 2022 - 1

노신사가 던진 질문

젊은이, 내가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소?

기차는 이제 막 긴긴 터널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K의 눈앞으로 끝을 알 수 없는 침엽수림과, 그 뒤로 설핏설핏 대륙의 거대한 호수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K는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절망이 가득한 얼굴. K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자신의 표정을 바라보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학창 시절 즐겨 보았던 소설과 영화들을 떠올리며. <오리엔트 특급 살인>, <패딩턴발 4시 50분>, <닥터 지바고>와 <설국열차>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K는 생각했었다. 언제고 꼭 한 번은 광활한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를 타보고야 말겠다고. 그리고 지금 K는 그 옛날 작품 속에서 봤었던 풍경과 똑 닮은 곳을 자유로이 달리고 있는 열차에 몸을 싣고 있다. 스스로 선택한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서야. K는 어쩌면 자신이 이곳에서 오리엔트 특급열차 속 희생자처럼 드라마틱하게 삶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을 믿으며 살아온 지리했던 세월이 무색하지 않도록. 스스로가 선택한 마지막이지만 결코 종교의 뜻에 반하지 않는, 자신이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그림대로 정리되는 삶. 이러한 혼재된 감정이 K안에서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K가 이러한 생각에 빠져있던 그때 K의 귓가로 질문이 날아든 것이었다. K는 창 밖으로 향해 있던 시선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복도 건너편 좌석이었다. 그곳에는 중절모를 깊게 눌러쓰고 독특한 모양의 뿔테 안경을 걸친 한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K가 노신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노신사는 희미한,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따스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K에게 두 번째 질문을 건넸다. 첫 번째 물음에 K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K는 생각했다. 어쩐지 노신사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서려 있는 것 같다고.

 

- 젊은이, 왜 그리 슬픈 표정을 짓고 있소?


K는 노신사의 말에 흠칫 놀랐다. 지금껏 자신은 창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K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말고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내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노신사가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닙니다. 조금 피곤한 것뿐입니다...


노신사는 흠흠, 헛기침인 듯한 소리를 가볍게 내더니 오른손으로 뿔테 안경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K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침엽수림 뒤로 얼핏 비치는 호수만큼이나 푸르른 노신사의 눈과 K의 눈이 마주쳤다.


- 잠시 내가 그쪽으로 자리를 옮겨도 괜찮겠소?


비어있는 K의 옆좌석을 흘깃 쳐다보며 노신사가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역시 이번에도 K는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아우라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신사는 왼쪽 손에 쥐고 있던, 알 수 없는 글자들로 빼곡한 신문을 좌석에 내려놓더니 이내 K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일어서는 노신사의 키가 기차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올라갔다. 앉아 있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노신사는, 마치 발에 키높이 죽마를 장착한 광대처럼 다리를 휘적이며 다가와 조심스럽게 K의 옆좌석을 차지했다. 그러고는 다시 예의 그 따뜻한 미소를 흘깃 내보이며, 아무 말 없이 동토에 내려앉은 눈만큼이나 새하얀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 제게, 묻고 싶은 게, 무엇인가요?

노신사의 알 수 없는 기에 눌린 K가 노신사의 눈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노신사는 다시 흠흠, 웃음소리인 듯 한탄인 듯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말했다.


- 질문은 이미 한 것 같소만? 그대의 표정 말이오...

노신사가 K의 눈을 꿰뚫을 듯 들여다보며 오른손으로 K의 얼굴을 가리켰다. K는 빠져들 것 같은 노신사의 눈빛을 마주하며 두려움과 동시에 호기심을 느꼈다. 이역만리에서 온 자신에게 이토록 관심을 표명하는 이를 K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K가 이곳에 온 지도 어언 1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는지…?

K의 의지와는 다른 질문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노신사는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악수를 청하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왼손을 내밀며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츠반도르프스키. 그냥 '츠반'이라고 불러주시오.

악수를 하며 맞잡은 노신사의 따뜻한 손이 차가운 K의 손을 덥혀주었다. 그러나 K는 차마 노신사의 이름을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K가 노신사의 온기에 익숙해져 갈 때쯤이었다.


- 이젠, 젊은이가 대답할 차례인 것 같소만?

노신사가 오른쪽 눈으로 살포시 윙크를 했다.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동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K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노신사의 눈빛이 마치 K의 생각과 입을 무장해제시키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K는 울컥, 하고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감추기 위해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차창에 비친 노신사의 모습이 대륙의 눈부시게 하얀 벌판 위에 포개진 채 K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K는 문득 오래전에 고인이 된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그의 길지 않았던 생에 단 한 사람, 한없이 다정하고 자상했던 분. K는 더 뭉클해지려는 감정을 가다듬기 위해 눈에 힘을 준 채 두세 번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노신사 쪽으로 고개를 돌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저는, 더 이상 삶에 대한 의지가 없습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을까요?

노신사가 이번에는 흠...이라고 깊게 울리는 소리를 내며 K의 표정을 살폈다.


- 왜 그런 건지 내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그 순간, K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의 마음이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K는 그런 자신이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노신사는 이역만리 처음 보는, 그리고 아마도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이었기에.


- 전 모든 걸 잃어버렸습니다. 제겐 더 이상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노신사는 이렇게 말하는 K의 얼굴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K는 자신이 한 말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 어르신은 '가상화폐'라고 들어보셨나요? 제가 영혼까지 탈탈 털어 넣어 투자했던 모든 것이 일순간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젠 제가 이곳에서 사라질 차례인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K의 대답을 들은 노신사는 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 '가상'이라 하면,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애당초 실재하지 않았던 것이 사라졌다고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슬픔에 빠진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소만...

K는 이렇게 말하는 노신사의 표정을 바라보며 억울한 감정이 점점 솟구쳐 나왔다. K는, 부티가 흐르는 듯한 노신사의 모습으로 인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그의 표현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답답한 K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 어차피 '가진 자'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노신사가 이번에는 왼손으로 자신의 수염 몇 가닥을 붙잡아 천천히 꼬더니 납득이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그 말은 전적으로 공감하오! '시간을 가진' 젊은이가 지금의 나를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일 테니.

호기심 어린 K를 마주한 채 노신사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인 후 말을 이어갔다.


- 만약 젊은이가 말한 그 '모든 것'을 내가 준다면, 내게 젊은이의 시간을 팔겠소?

노신사에게서 묘한 기운이 번져 나오는 것 같았다. K는 문득 좀 전의 그 알 수 없었던 두려움이 생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K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노신사가 호탕한 웃음소리를 냈다.


- 하하하~ 놀라지 마시오. 농담이오, 농담!

노신사는 오른손으로 툭툭, K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 감추고 싶었던 얘기를 내게 들려준 것 같으니, 내가 사례를 좀 하고 싶은데...

노신사가 K 쪽으로 몸을 가까이 들이밀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 순간 K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K는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K는 그저 배가 곯지 않을 정도로 챙겨 먹을 의지와 돈이 있을 뿐이었기에. 소리를 들었는지 노신사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K에게 제안했다.


- 지금 젊은이의 몸이 내 말에 대답을 제대로 해주었소. 하하~ 여기 식당칸 음식이 맛있는데, 같이 한번 가보지 않겠소?

사실, 식당칸을 다녀온 승객들에게서 나는 달콤한 냄새에 어쩔 수 없이 식욕이 솟아 나오곤 했던 K였다. K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화 속에서나 봐왔던 멋진 풍경에 곁들여진 만찬을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K의 착각이었을까, 그 순간 화려한 접시들에서 들려올 법한 '딸그랑 딸그랑'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리는 동시에, 처음 맡아보는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K의 뱃속이 좀 전보다 더 큰 소리로 진동했다.


- 그래도 될는지...?

이렇게 말하는 K의 얼굴을 보며 노신사가 따스한 미소와 함께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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